자동차·은행 등 등급 하향에 잇단 폭락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잇따라 국내 기업의 신용등급 하향조정에 나서면서 11년 전 외환위기 때와 같은 `신용평가의 저주'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용평가사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큰 탓에 표적권에 드는 종목의 주가가 내려가긴 하겠지만 국내 기업의 펀더멘털이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튼튼해 당시와 같은 폭락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진단했다.

17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14일부터 자동차, 은행업종을 중심으로 국제 신용평가사의 국내 기업 신용등급 하향조정이 잇따르면서 해당 기업의 주가가 폭락하는 등 파장이 커지고 있다.

피치 레이팅스는 지난 14일 현대차와 기아차의 장기 외화표시발행자등급을 종전의 'BBB-'에서 'BB+'로 하향조정하고 등급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다음날에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글로비스, 현대캐피탈, 현대카드의 장기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무더기 하향 조정했다.

이어 16일에는 은행업종이 표적이 됐다.

무디스가 국민은행, 신한은행 등 10개 국내 은행들의 신용등급 하향조정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신용평가사의 등급 하향조정에 자동차주와 은행주의 주가가 급락해 현대차는 15일 10% 이상 폭락했으며 대표적인 은행주인 KB금융도 같은 날 10% 가까이 떨어졌다.

문제는 신용평가사의 등급 하향조정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면 관련 기업의 주가가 상당 기간 하락세를 이어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당시 국제신용평가사들의 `저주'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신용평가사들의 최근 움직임은 시장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여진다.

은행주들은 1998년 초 쓰레기 채권으로 불리는 `정크본드' 수준으로 신용등급이 낮춰지면서 폭락세를 거듭했다.

외환은행 주가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월 1만8천원 수준이었으나 1998년 9월엔 2천400원대까지 폭락했으며, 기업은행과 부산은행, 전북은행, 대구은행 등도 비슷한 신세였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은행주와 자동차주의 실적이 급속히 악화하고 있어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외환위기 당시와 같은 주가 폭락은 가능성이 작다고 전망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5개 시중은행이 퇴출당할 정도로 은행의 생존 자체가 의문시되던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당시보다 은행의 자산건전성이나 위기 대응능력 등이 훨씬 강화돼 단순히 비교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
대우증권 구용욱 연구위원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은행의 자구 노력 등이 진행되고 있어 이번 신용등급 하향 검토가 은행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굿모닝신한증권의 이기정 애널리스트는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국내 자동차업체들은 부도 가능성이 낮은 편이어서 신용등급 하향조정이 주가 폭락을 불러올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안승섭 기자 ss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