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1 · 16 쇄신인사'의 키워드는 '스피드'와 '현장'이다. 그룹 안팎에 몰아닥친 경영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만 60세 이상 사장 전원 퇴임' 등 연령의 잣대와 함께 5~6년 이상 장기 재임한 최고경영자(CEO)들을 대부분 퇴진시키는 등 과감한 세대교체를 통해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선언으로도 읽힌다. 신임 사장들은 현장에서 보고 듣고 판단,빠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을 전진 배치했다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이번 인사에서 발탁된 인사 중에는 재무와 현장 전문가가 많다. 카드 대표이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최도석 전자 경영지원총괄 사장은 타고난 살림꾼이다. 최고재무책임자(CFO)로 매출 100조원에 달하는 삼성전자의 글로벌 약진을 훌륭하게 조율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버랜드 사장으로 승진한 최주현 코닝정밀유리 부사장도 그룹 내 대표적인 재무통으로 꼽힌다. 1979년 전자에 입사한 후 자금과 경영관리,경영진단 업무 등을 두루 거쳤다.

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에서 전기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박종우 사장은 현장 전문가 군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삼성전자 TV 부문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것이 그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차세대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이 그룹 내 중평이다.

전자 LCD사업부 사장으로 승진한 장원기 전자 부사장도 '현장 빠꿈이'로 분류된다. 장 부사장은 삼성이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을 처음 시작한 1993년부터 LCD 업무를 담당해온 인물로 '삼성 LCD 신화'의 주역 중 하나다. 제조와 관련된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석유화학 사장으로 발령된 윤순봉 삼성 업무지원실 부사장은 이번 인사 사장 승진자 중 최연소다. 경영혁신 전문가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16년간 다양한 분야의 연구활동을 수행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 해결책을 내놓기 때문에 '답이 있는 인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브랜드관리위원장과 물산 보좌역을 겸직하게 된 장충기 물산 부사장은 삼성 내에서 대표적인 기획통으로 통한다. 1978년 물산에 입사한 후 기획과 경영관리 업무로 커리어를 쌓아왔다.

인사 · 노사문제 전문가인 노인식 에스원 사장도 중용됐다. 중공업 사장으로 발령된 노 사장은 노사 안정을 바탕으로 '삼성의 조선신화'를 이어갈 수 있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이번 인사로 퇴임이 결정된 인물은 18명에 달한다. '애니콜 신화'를 만든 이기태 전자 대외협력담당 부회장과 '황의 법칙'으로 유명한 황창규 전자 기술총괄 사장도 퇴임자 명단에 포함됐다.

삼성전자에서 해외 주요 거점을 담당했던 사장들도 대폭 교체됐다. 오동진 북미총괄 사장,양해경 유럽총괄 사장,이현봉 서남아총괄 사장 등이 상담역으로 물러난다. 전자 해외 사장단 후속 인사가 이번 사장단 인사 명단에서 빠진 것은 부사장급이 후임으로 임명되기 때문이라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브랜드관리위원장을 맡아왔던 이순동 사장은 퇴임해 상담역으로 물러난 뒤 사회봉사단장을 맡는다. 이 사장의 인사는 이번 사장단 인사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 정기 인사의 기준은 나이와 재임기간,성과 등 크게 세 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나이라는 설명이다. 만 60세(1948년생)가 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용퇴했다.

삼성 관계자는 "최근 3~4년을 제외하면 CEO들이 60세 이상 되면 경영을 이양하기 위해 후진을 양성하고 경영사항을 인수인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며 "이번에 그 원칙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60세 원칙이 내년에도 계속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인사를 주도한 것은 이윤우 전자 부회장 등 6명의 고참 CEO로 구성된 인사위원회다. 인사위원회는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하고 있는 이수빈 생명 회장의 제의로 지난 7일 정례 수요 사장단회의 직후 결성됐다.

위원장을 맡은 이윤우 부회장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전자제품 전시회 'CES 2009' 출장에서 돌아온 12일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인사와 관련된 계열사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인사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인사위원회의 역할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윤우 부회장 등 인사위원회 소속 CEO들이 승진 및 퇴진 대상자와 수차례 접촉해 인사 방향을 조율했다"며 "논란의 소지가 없는 나이를 기준으로 삼아 큰 잡음 없이 인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룹 차원에서 신설한 조직도 있다. 삼성은 사장단협의회 산하에 커뮤니케이션팀을 만들 예정이다. 이 조직은 대 언론 홍보를 전담한다. 팀장은 이인용 전자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해 맡을 예정이다. 사장단협의회를 지원하는 업무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업무지원실에서 담당한다. 이 업무는 장충기 신임 브랜드관리위원장이 총괄한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