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자정노력, 청장들 잇단 비리로 물거품
안정적 세수확보 절실한 때라 우려 더 커



"1970년대 중반 일선 세무서의 일부 주사는 월급을 가져가지 않았다. 월급의 몇 배 또는 수십배의 뇌물을 챙겼기 때문이다. 10여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에는 월급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오면 총무과에 전화를 해 이유를 물었다. " (전 국세청 간부)국세청이 이렇게 조금씩 개선됐지만 청장들의 대형 비리가 이어지면서 신뢰도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떨어졌다. 국세청의 신뢰 상실은 징세 능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아 재정 지출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 안정적인 세수 확보가 절실하다는 점에서 청장들의 스캔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주성 전군표 전 청장이 비리 혐의로 잇달아 구속된 데 이어 한상률 청장마저 '그림 로비' 의혹에 휘말려 신뢰도를 개선하려는 국세청 직원들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2만여 국세공무원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이미 일선 세무서에서는 경기 부진으로 원천징수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다는 말들이 들리고 있다. 작년 말부터 종합부동산세 환급,유가환급금 지급 등으로 세금 징수에 쓸 시간을 많이 뺏긴 국세청은 올해 근로장려금 지급까지 앞두고 있다. 여기에 신뢰 상실에 따른 국세공무원들의 사기 저하까지 겹친다면 자칫 징세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다.

국세청은 한 청장 체제 출범 이후 이미지 회복에 힘써 왔고 나름대로 성과를 냈던 것이 사실이다. 어려운 경제 여건을 고려해 과감하게 세무조사를 유예하고,잘못 납부한 세금을 알아서 찾아 돌려주는 등 과거에는 보기 힘든 적극적인 민생 챙기기에 나섰다. 지난해 국세청의 납세자 신뢰도 점수가 71.8점으로 전년보다 9.3점이나 높아진 것도 이 덕분이다. 그러나 잊혀질 즈음마다 또다시 터지는 국세청장들의 비리는 이 모든 이미지 쇄신 노력을 한방에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다.

현진권 아주대 경제학부 교수는 "과거에는 국세청의 비리가 일선 세무서에서 많이 터졌지만 최근에는 모두 최고위층에서 나온다"며 "이는 제왕적인 청장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위계질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국세청 비리는 대부분 세무조사라는 막강한 권한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세무조사에서 국세청의 자의적인 요소를 배제시킬 수 있는 방안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권한이 약해지면 매번 불거지는 이른바 '알짜'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인사청탁 잡음도 사라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국세청장을 외부에서 수혈하는 등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강도 높은 국세청 조직 개혁이 이뤄져야 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전병목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은 "국세청장 비리는 국세청의 독립성과 투명성이 충돌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작용"이라고 분석했다. 국세청은 외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조직과 업무의 독립성이 강조돼 왔다. 이 때문에 청장도 내부 승진을 하는 것이 오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독립성은 폐쇄성으로 이어졌고 외부에는 부적절하게 보일 수 있는 선물 상납 등도 당연한 관행으로 오랫동안 지속됐다는 설명이다. 전 연구위원은 "국세청장 한 명을 외부 인사로 세우는 것만으로는 조직 장악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제대로 된 개혁이 추진되기 힘들다"며 "좀더 구조적인 조직 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