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률 국세청장이 차장 재임 시절 전군표 당시 청장에게 고가의 그림을 전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미술계에서는 또 그림 상납설에 휘말려 미술시장에 대한 인식만 악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화랑가에서는 예전부터 권력을 둘러싼 그림 상납설이 종종 불거졌다.

그러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난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

1970년대 권력형 부정축재 사건이 터지면 권부의 실세인 A씨의 집에서 혹은 B씨의 별장에서 추사 김정희, 고려 청자 등 수백점의 골동품이 발견됐다는 얘기가 으레 돌았다.

물론 그런 골동품 중 어떤 것이 뇌물로 받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수십년간 인사동에서 골동품점을 운영했던 한 미술통은 "당시 진위 확인에 참여했으나 대부분 가짜이거나 허접한 작품인 경우가 많았다"며 "실체가 없이 끝나곤 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이런 사례는 간간이 불거졌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신동아그룹을 상대로 제기됐던 '옷로비'와 함께 불거진 '그림로비' 사건 역시 말만 많았지 구체적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채 흐지부지 끝났다.

뇌물이나 각종 비리 사건에서 현금과 함께 그림이 전달됐던 사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딱히 대표적인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주는 측이나 받는 측이나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선물'이라는 포장을 씌워 워낙 은밀하게 거래가 이뤄지는데다가 입증이 쉽지 않다는 점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상류층이 재산의 편법적인 상속이나 증여의 수단으로 고가의 미술품을 활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미술판에 대한 일반의 왜곡된 시선과 오해도 그림 상납설이 나오는 배경이라는게 화랑가의 인식이다.

고양 아람미술관 정준모 전시감독은 "되돌려 생각해봐도 실체가 드러난 대형 그림 로비 사건은 없었다"며 "그림이 뇌물로 사용됐다면 현금 봉투를 끼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주로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일, 뇌물로 그림을 받았다면 수뢰자 입장에서는 미술 작품의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고 주는 측도 받는 측에서 그림을 마음에 들어할지 불안한 상황에 빠진다"며 "결국 뇌물 수단으로 그림은 현금의 '부록격'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뢰 혐의로 징역형을 살고 있는 전군표(55) 전 국세청장이 청장 재임 시절 한상률 현 청장(당시 차장)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된 최욱경(1940-1985) 화가의 고가 그림인 '학동마을' 역시 현재로서는 '상납'의 진실이 명쾌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전군표 전 청장의 부인 이모(50)씨는 "2007년 한상률 국세청 차장 부부와 시내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한 차장 내외로부터 선물받았다"고 주장했지만 한 청장은 해명자료를 통해 "전군표 전 청장 부부와 우리 부부 4명만 만난 사실이 없다"면서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최욱경 화가의 20주년 회고전을 열었던 K갤러리 측도 "문제의 작품은 당시 회고전 때 도록에 싣고 전시장에는 걸지 못했던 작품으로 기억되며 소장자에게 돌려줬다"면서 "절대 뇌물로 준 적이 없고 줄 이유도 없다"고 밝혔다.

이어 "한 청장이 문제의 그림을 갖고 있었다면 소장 경위는 한 청장에게 물어보라"면서 "2005년 당시 세무조사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청와대 민정라인이 이번 그림 상납설을 둘러싸고 제기된 의혹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화랑가 인사는 "전군표 전 청장 부인의 주장이 맞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면 아마도 대표적인 그림 상납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경수현 기자 ev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