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 JP모건체이스은행 서울지점장(43)은 외환위기 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지곤 한다. 원 · 달러 환율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치솟던 때였다. 외환 딜러가 달러를 사고팔다 수억원씩 손해를 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자신의 연봉보다 더 큰 액수를 손해보는 날도 많았다. 대규모 손실에 따른 문책을 당해 은행문을 나서는 동료들도 숱하게 봤다. 그 외환위기를 한복판에서 헤쳐 나온 게 이 지점장이다. 그것도 외환딜러로서 말이다. 이 지점장이 처음 외환 딜러 업무를 맡은 건 산업은행에 다니던 1993년.지금은 국내에서 '넘버원'을 다투는 베테랑 외환 딜러로 꼽히지만 처음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더 이상 못하겠다며 아내 앞에서 울었던 적도 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봄이었다. 당시 체이스맨해튼은행(현 JP모건체이스은행)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왔다. JP모건의 제안은 은행원이 아닌 '외환 딜러 이성희'를 데려가겠다는 것.선택을 해야 했다. 평범한 은행원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갈 것이냐,시장을 주름잡는 프로 외환 딜러에 도전할 것이냐.

"주변에서는 가지 말라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안정된 직장을 왜 버리느냐는 거였죠.외국계 은행에 가면 얼마 못 가 해고될 것이라는 조언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왕 외환 딜러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최고가 돼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

아니나 다를까. JP모건으로 옮기자마자 외환시장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연초부터 원 · 달러 환율이 9일 연속으로 오르는 등 이미 외환시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던 때였다. 자고 일어나면 환율이 수십원씩 올라 있었다. 손해도 많이 봤다.

당시 이 지점장은 외환시장에서 '숏돌이'로 통했다. '숏돌이'는 달러를 사기보다 팔기 좋아하는 딜러를 일컫는 말이다. 환율이 오르는 상황에서 달러 파는 걸 선호하다 보니 당연히 손실도 컸다. 하루에 30억원 가까운 손실을 낸 적도 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는 절망이 엄습하려는 순간,그가 부둥켜 잡은 건 뚝심이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이 예측한 환율대로 거래 주문을 내고 버텼다. 그 덕분이었는지 한번은 달러를 팔고 나자 환율이 200원 가까이 떨어져 수십억원을 벌기도 했다.

"한때 외환시장에서 제 별명이 독사였습니다. 딜러는 어느 정도 승부사 기질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라도 저하고 붙으면 쉽지가 않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죠.환율이 오르던 시기에 달러를 많이 팔았으니 시장 안정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고도 생각합니다. "

외환위기는 외환 딜러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사실 외환위기 전만 해도 딜러의 역할이란 게 중개 기능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환율도 제한폭 내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보거나 이익을 낼 일도 없었고요. 그런데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외환 딜러가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실력 있는 딜러들이 두각을 나타낸 것도 그때부터죠."

말 그대로였다. 그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97년 이직할 때 차장에 불과했던 그는 부장 부지점장 상무 본부장 등을 순식간에 거쳤다. 그리고 회사를 옮긴 지 만 10년이 안 된 2006년 지점장으로 승진했다.

다시 비슷한 상황이 왔다. 외환딜러들에겐 또다시 진검승부의 시기다. 환율예측에 따라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시점이다. 그렇지만 이 지점장은 이제 안달하지 않는다. JP모건에서 근무한 12년 중 10년을 외환 딜러로 생활한 그다. 외환위기를 거뜬히 넘긴 경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일을 즐기며 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예전에 한 선배가 말했습니다. 외환 딜러들은 회사에 돈 내고 다녀야 한다고요. 회사돈으로 수백억원대의 포커게임을 하는 것이니 얼마나 재미있느냐는 거죠."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 외환시장이 끝나면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여전히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있다. 외환위기를 도약의 계기로 활용했다는 경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덕분이다.

글=유승호 기자/사진=임대철 인턴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