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여파는 컸다. 클래식 공연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업협찬은 뚝 끊어졌다. 지갑이 얇아진 관객들은 클래식 공연을 볼 여력이 없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급팽창하던 클래식 공연계는 1998년 절반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대부분의 클래식 공연기획사들은 문을 닫았다. 이창주 대표(55)가 이끌던 공연기획사인 빈체로도 마찬가지였다. 빈체로가 문을 연 지는 고작 3년.이제 자리를 잡나 하는 순간 외환위기가 닥쳤다. 해외 연주자들에게 줄 돈이 없다 보니 공연은 줄줄이 취소됐다. 문을 닫느냐,마느냐의 절체절명의 순간.이 대표는 갖고 있던 부동산을 전부 팔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3억원가량의 빚을 져야만 했다.

이를 악문 이 대표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웠다. '돈은 잃어도 고객은 잃지 말자'였다. 연주자와 관객이라는 두 고객을 중매시키는 것이 기획사의 역할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를 위해 국내에 있는 해외 각국의 문화원들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다. 그 나라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중 한국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을 함께 국내에 소개하자고 제안했다. 어떡하든 공연업체의 기능은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괜찮았다. 물론 공연횟수는 줄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연주자들을 고객에게 소개시키며 명성을 쌓아갔다. 해외 아티스트들에게 한국시장이 살아 있음을 계속 각인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황을 타개하는 건 역부족일 수밖에.이 대표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다른 기획사들이 국내 대기업에 손을 벌릴 때 이 대표는 환율 급등으로 재미를 보고 있던 외국계 기업을 공략했다. 음악교육사업도 펼쳤다. 당시 클래식 연주자가 꿈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각종 캠프와 콩쿠르를 열어 수익원을 다각화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연주자를 소개하고 수익원을 다변화하는 전략은 성공했다. 빈체로는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클래식 공연사의 대표주자로 부상했다. 첼리스트 안노 비스마,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등도 빈체로가 국내에 처음 소개한 연주자들이다.

이 대표가 이처럼 클래식 공연에 '목숨'을 건 데는 그의 취미도 한몫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한 예술 애호가였다.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렇지만 정작 첫 직장은 엉뚱했다. 한국외대 독일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 것.견딜 수 없었다. 그의 예술적 감수성은 답답하기만 한 월급쟁이 생활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1987년 결혼과 동시에 호텔경영 공부를 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학업을 마친 뒤 다시 독일로 건너가 여행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도 아니었다. 이 대표는 결국 마음의 고향과 같은 클래식 공연사를 설립했다. 클래식 업계는 상술과 예술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야 하는 곳이다. 티켓 파워가 있는 연주자를 찾아내 마케팅을 펼치기 위해서는 상술이 필요하다. 연주자와 계속해서 함께 작업하기 위해서는 예술적인 공감대도 형성해야 한다. "음악에 대한 조예를 바탕으로 사업을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클래식 공연계에도 다시 한파가 닥치고 있다. 이 대표는 이번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획사들이 좀 더 새로운 연주자들을 발굴해야 한다고 믿는다. 베를린 필과 같은 특A급 단체 대신 독주자,비교적 작은 규모의 실내악단 등을 섭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세계 공연계는 의외로 굉장히 좁은 바닥이에요. 아티스트들끼리는 늘 소통하고 지내거든요. 지금은 한국 클래식 시장이 활발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

이 대표는 이번 기회에 국내 아티스트들을 발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국내 연주자들을 무대에 세운다면 클래식 관객들에게 좀 더 저렴한 가격에 티켓을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 공연장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결국 위기를 극복할 해답은 존재합니다. 중요한 건 긍정적 자세를 갖는 거죠. 긍정적 사고야말로 위기극복의 바탕입니다. "

글=박신영/사진=강은구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