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영 < 美 하워드대 교수ㆍ경제학 >

한국에서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 국회에 상정 중이다. 여기 워싱턴에서도 여러 단체들이 한ㆍ미FTA를 이슈화하고 있다. 한국은 한ㆍ미FTA가 조속히 발효되기를 원하고 있다. 한ㆍ미FTA가 양국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는 초석이 되고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중요하다는 데 대해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한ㆍ미FTA를 언제 비준할지 모른다. 미국의 경제상황과 오바마 정부의 경제정책 우선순위에 달렸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지금 미국경제는 일대 혼란에 빠져 있다. 금융위기가 실물부문의 경기후퇴로 확대되면서 실업자가 속출하는 등 경제전반이 위기국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관심사는 미국 자동차 회사의 구제여부이다. 자동차 산업이 미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 뿐 아니라 실업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 기업을 구제할 필요가 있다. 최근 부시 행정부는 174억달러의 단기자금을 GM과 크라이슬러에 공급하기로 했다. 오는 3월31일까지 회생 가능성을 증명해야 재정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자동차 회사의 임금을 도요타 등 외국 자동차 회사의 임금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그러나 전미자동차노조(UAW)가 이에 반발하는 등 난항을 겪고 있다.

이달 20일 업무를 시작하는 오바마 행정부에 이 과제가 넘어간 형국이다. 오바마 당선인은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시행할 계획이다. 경제위기로 큰 타격을 받고 있는 중ㆍ하위 계층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고용사정을 어떻게든 개선시키는 등 국내 정책과제 해결에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국민 역시 신정부에 대해 이것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 역사를 보면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에게 약속한 공약을 국회에서 처리하는 데 취임 첫 해를 보낸다. 오바마 당선인은 미국경제가 회복하는 데에는 2년 넘게 걸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경제상황의 심각성과 정책의 우선순위를 감안하면 미국은 상당기간 대외 경제업무에 큰 비중을 두지 못할 것이다. 실제 오바마 당선인은 당선 이후 한ㆍ미FTA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국가와의 FTA 등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 선거기간 동안 부시 행정부가 추진한 FTA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미국 입장에서는 2010년 이후에나 한ㆍ미FTA를 논의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외교협상은 성급한 국가가 상대국의 요구조건을 수용할 때 끝나게 된다"라는 헨리 키신저의 말이 적용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한ㆍ미FTA와 관련해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길은 무엇인가. 현재로서는 한국 국회가 먼저 한ㆍ미FTA를 비준한 다음 미국이 발등에 떨어진 불인 경제위기를 진화할 때까지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커진 경제규모에 걸맞게 미국 및 세계 경제 회복에 일조를 하는 것이다.

미국 의회의 행동을 기다리는 동안 한국은 유럽연합(EU) 등과 FTA를 추진함으로써 세계경제에서 역할을 확대하는 한편 다른 유형의 세계적 현안에 있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하나의 방안이다. 이것이 미국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길이기도 하다.

오바마 당선인은 미국 국민의 자신감 회복,경제 재건 등 국내문제에 전념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 상황에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FTA 문제를 제기해 미국정부의 정책결정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고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한국은 오바마 당선인의 미국경제 회복 작업을 도와주는 게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한ㆍ미FTA를 성사시키는 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