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해도 미탈그룹은 별 볼일 없었다. 1999년 기준 '세계 10대 철강회사'는 포스코 신일본제철 아르베드 등의 순이었다. 아르셀로미탈은 순위권 한참 밖인 16위에 그쳤다.

대역전을 일궈내는 데는 10년으로 충분했다. 세계 경제가 '불황'이라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체력 약한 철강기업들은 줄줄이 궤도를 이탈했다. 길목을 지키던 미탈은 이들 기업을 싼 값에 주워담았다. 그리고 수직 상승했다. 5년 뒤인 2004년 세계 2위 철강회사에 올랐고 2005년엔 미국 철강기업 ISG 인수로 1위에 등극했다. 이듬해인 2006년엔 유럽 철강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아르셀로까지 집어삼켰다.

포스코는 미탈의 광풍이 몰아치는 동안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세계 주요 철강회사 가운데 최초로 철강 전 공정에 대한 전산시스템을 완비했고 전략적인 기술투자도 병행했다. 1위 자리는 내줬지만 2위 그룹에서는 한 번도 밀려나지 않았다.

10년 전 10대 철강회사 중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는 곳은 단 세 곳 뿐이다. 앞으로 10년 뒤에도 극심한 순위 변동은 불가피하다. 때마침 변혁의 기운이 융성하다. 극적인 판도 변화는 항상 불황기에 잉태되는 법이다.


◆공격과 수비

2006년 1월13일 런던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락시미 미탈의 대저택.유럽 최대 철강회사인 아르셀로의 가이 돌레 회장이 미탈 회장과 마주 앉았다. 식전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미탈이 돌레 사장에게 합병 얘기를 꺼냈다. 갑작스런 공격에 돌레 사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 자리에서 거부의사를 밝히고 돌아서긴 했지만 뒤끝이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2주 후인 1월26일.돌레 사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미탈 회장이었다. "내일 아르셀로의 주식을 공개매수하겠다고 발표하겠습니다. " 돌레 사장은 아무 대답없이 전화를 끊었다. 유럽 시간으로 오후 11시께.철강업계에 전대미문의 공룡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세계 수위권을 달리던 포스코는 뒤통수를 맞았다. 조강생산량 기준으로 순식간에 아르셀로미탈의 4분의 1 수준이 돼버렸다. 미탈그룹이 아르셀로를 집어삼킬 무렵 포스코도 기업 인수ㆍ합병(M&A)을 고려했다. 몇몇 철강업체를 놓고 저울질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사이 철강업계의 구도는 확 바뀌어 버렸다.

비난이 잇따랐다. 포스코의 보수적인 의사결정을 꼬집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포스코는 본업에 충실하는 길을 택했다. 무모한 공격보다 탄탄한 수비를 앞세워 장기전에 대비했다. 철강시장이 극심한 침체에 빠진 2001년과 2002년에도 각각 1조8800억원과 1조8000억원을 투자해 생산성과 기술력을 높였다. '파이넥스'라는 세계 최초의 신기술도 이 시기에 축적된 내공으로 빚어낸 성과물이다.


◆불황의 힘

이런 노력에도 한동안 아르셀로미탈을 꺾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작년 하반기 이후 철강시장이 극심한 침체국면으로 빠져들면서 아르셀로미탈이라는 거대한 철강제국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르셀로미탈은 작년 말까지 북미지역 생산을 40% 줄이는 동시에 미국 내 임직원의 16%를 해고했다.

올해도 주요 철강업체들에는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아르셀로미탈처럼 잇따른 M&A로 대형화를 추구한 업체일수록 사정은 더욱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또다시 철강업체 매물이 줄을 이을 가능성도 높다. 상대적으로 무리한 투자 없이 속살을 찌워 온 포스코 입장에서는 '회심의 한방'을 날릴 호기가 찾아온 것이다.

철강업계 전문가들도 닥쳐 온 불황이 포스코에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데 이견이 없다. 탁승문 포스리 철강연구센터장은 "올해는 살아남는다는 차원을 떠나 미래를 위한 투자에 나서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포스코도 올 한 해 사정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르셀로미탈 등 2000년대 들어 갑자기 몸집을 불린 업체들에 비해서는 형편이 낫다. 쌓아 놓은 현금성 자산도 4조5000억원에 달한다. 꾸준히 기술력을 높여온 덕에 직원 1인당 생산성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은 5.7%(2006년 기준)로 아르셀로미탈(24.2%)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작년 한 해 공을 들였던 '대우조선 인수'에 실패한 것은 오히려 몸을 가볍게 하는 요인이다.




◆이제 미탈을 넘는다

포스코가 올해 국내 투자규모를 사상 최대인 6조원으로 늘려 잡은 것은 이번 기회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다. 국내 투자와 별도로 해외 M&A를 위해 1조원가량도 쟁여 놓았다. 내부적으로는 최근 들어 값이 싸진 철강업체들의 동향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 주기적으로 잠재적 매수 후보업체들의 시가총액도 체크한다. 기회가 닿으면 즉각 '공격 명령'을 내릴 태세다. 이를 위해 최근엔 M&A 실무팀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포스코의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에는 직전 불황기에서 얻은 경험이 녹아 있다. 철강시장 침체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업계 판도가 확 바뀌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했다. 2000년대 초반 전 세계 철강시장이 '공급과잉'으로 몸살을 앓았을 때 철강업계에 'JFE'라는 새로운 강자가 떠오른 것이나 미탈그룹이 미국 철강회사인 ISG와 합병을 통해 아르셀로 인수를 위한 토대를 닦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포스코도 도약을 위한 여건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언제 얼마나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느냐는 것.철강업체 관계자는 "대형 M&A의 성패는 대부분 신속한 판단과 결정에서 판가름이 난다"며 "포스코가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떨쳐내고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야만 세계 정상의 철강회사로 거듭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