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커녕 한글로 읽기도 쉽지 않은 啐啄同機(줄탁동기) 또는 啐啄同時(줄탁동시)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면 안에서 쫄 때(?) 바깥에서 어미 닭이 함께(同時, 同機) 쪼아줘야(啄) 순조롭다는 뜻인데요.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다, 난관 극복을 위해 서로 힘을 모으다, 상생의 지혜를 발휘하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고요.

국내 최대 민간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국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수백명을 대상으로 미국 월스트리트발 경제위기 상황을 극복하는데 들어 맞는 한자성어를 조사한 결과, 이 말을 가장 많이 꼽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칭된 미국발 위기는 158살 먹은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보호 신청, 9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메릴린치사가 BOA사로의 피인수합병 등 2008년 9월 15일에 발생한 초대형 사건에서 비롯되고 있고요.

세계적 명성의 초대형 금융사들을 순식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이날의 사태는 글로벌 경제를 바람 앞의 촛불같은 전도 불투명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도 16일 주가가 크게 떨어지고 환율이 급등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요.

이런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줄탁동기' 해야 한다는 게 국내 CEO들의 의지인 셈입니다.

근데 줄탁동기라는 말을 가만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 합니다.

난관 극복을 위한 방법으로 '닭들의 지혜'를 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머리가 좋지 않다는 걸 말할 때 "닭대가리냐?"라고 하잖습니까?

병아리와 어미닭이 서로 알을 깨는 줄탁을 실제로 실행한다면 닭은 결코 머리가 나쁜 동물이 될 수 없을 겁니다.지금까지 무시해온 닭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대목이지요.
줄탁동기는 중국 宋나라 시대 불서 벽암록(碧巖錄)에서 출처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수행할 때 스승이 봐서 공부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화두를 던지고, 제자는 그걸 풀면서 깨우치게 되는 데서 비롯됐다는 거지요.

국내에서는 한자에 능한 김종필 전 총리가 1997년 신년휘호로 이 말을 쓰면서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지요.그 때 김 전 총리는 이 말을 '세상 일은 때가 있다'는 말로 보충적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참고로 김 전총리의 신년휘로는 1996년에 부대심청한(不對心淸閑:대꾸하지 않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1997년 줄탁동기, 1998년 사유무애(思惟無涯:생각하는데 막힘이 없다), 1999년 일상사무사(日常思無邪:매일 나쁜 생각을 버려야 한다), 2000년 양양천양 유유고금(洋洋天壤 悠悠古今:우주는 한없이 넓고 역사는 아득히 멀다), 2001년 조반역리(造反逆理:뒤바꾸는 것은 세상이치를 거역하는 것), 2002년 이화위존(以和爲尊:화합하는 것이 가장 존귀하다)으로 정했었습니다.

줄탁동기는 해태제과와 크라운제과를 이끌고 있는 윤영달 회장이 경영론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윤 회장은 "경영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할 때 보통 톱다운은 일본식이고 보텀업은 미국식을 말하지요. 두 가지 이론을 뛰어넘으려면 한국에선 위아래가 동시에 만나는 이른바 '줄탁동기' 방식이 돼야 합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하네요.

디지털뉴스팀 newsinf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