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해외 진출 패턴이 바뀌고 있다.

사무소→지점→현지법인의 수순을 밟아가며 수년에 걸쳐 차근차근 뿌리를 내리던 방식에서 현지 은행 인수.합병(M&A)을 통해 단번에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카자흐스탄 BCC(Bank CenterCredit)에 1조원을 투입,지분 50%를 확보한 국민은행이 대표적 사례.은행들은 중국에선 철저한 현지화로 중산층 이상 고객들을 공략하고 있다. 또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은 홍콩에 IB센터를 구축,골드만삭스 씨티그룹 등처럼 대규모 글로벌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들어 속도를 내고 있는 은행들의 해외 진출 전략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카자흐스탄 제1의 도시 알마티의번화가 '쥐벡졸리(비단길)'.연간 400억달러씩 쏟아져 들어오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루이비통 구찌 샤넬 등 명품이 하루에만 수십억원어치 팔려나간다.

이곳에 광고판을 내걸어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는 회사는 두 곳.하나는 LG전자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 은행인 BCC다.

BCC는 카자흐 6위 은행이지만 최근 3년간 연평균 80%씩 성장하고 있는 은행.

이 은행을 국민은행이 인수한다.

국민은행은 BCC 지분 30%를 6213억원에 사들이고 앞으로 30개월 내에 20.1%를 추가로 매입해 경영권을 확보키로 지난 3월 계약을 맺었다.

국민은행이 BCC를 인수하는 데 투입하는 돈은 줄잡아 1조원.국내 금융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M&A다.

국민은행이 외국 은행 M&A에 거액을 베팅한 이유는 뭘까.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진정한 해외 진출을 하려면 M&A 외에 다른 무슨 방법이 있나"라는 반문으로 유일한 방법임을 강조했다.

해외 지점이나 현지법인은 실제로는 현지에 나가 있는 한국 기업,주재원,교포 등을 상대할 뿐이다.

국내 금융의 연장일 뿐 제대로 된 글로벌금융이 아니라는 게 강 행장의 판단이다.

현지 기업과 현지인에게 접근하기 위해선 역시 현지은행을 통할 수밖에 없다.

국민은행이 카자흐 은행을 산 것은 씨티은행이 한미은행을,스탠다드차타드가 제일은행을 사서 한국 내 영업을 강화한 것과 같은 차원이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초부터 카자흐를 눈여겨 봐 왔다.

세계 11위의 석유 매장량,세계 2위의 우라늄 등 막대한 자원을 배경으로 2000년대 들어 연평균 10% 안팎의 고도성장을 구가하는 국가인 만큼 금융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무한할 것이란 생각에서다.

성장의 동력은 오일머니와 더불어 유럽계 은행.국제금융기구들로부터 자금을 차입해 인프라 구축,부동산 개발,공장 건설 등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쿠아트 코즈하크메토프 카자흐스탄 금융감독원 부원장)

지난해 중반 터져나온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는 국민은행에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제공했다.

카자흐는 외국으로부터의 자금 차입 및 만기 연장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으며 8년간 10배 뛴 부동산가격은 지난해 중반 이후 30% 이상 하락했다.

카자흐가 외화 유동성 위기 및 부동산발 경제위기를 피해가기 힘들 것이란 비관론이 대두됐으며 은행 주가는 폭락했다.

지난해 6월 설립한 현지사무소와 서울 본점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현지사무소는 애초부터 M&A를 위한 지원 기지였다.

인수 대상을 물색하던 터에 BCC의 설립자 겸 최대주주인 바키트베크 R 바이세이토프 이사회 의장이 지분 매각 의사를 시장에 내비쳤다.

당초엔 BCC가 6위에 그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게 사실.하지만 1~3위권 현지은행 인수를 추진하다가는 반(反)외자정서의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눈높이를 4~6위권으로 낮췄다.

이 가운데서 △소매금융에 강점을 가지고 있고 △견실한 성장을 이뤄나가고 있으며 △경영진이 뛰어난 은행 등의 조건을 갖춘 BCC를 대상으로 낙점했다.

국민은행은 글로벌 금융주 폭락이란 상황을 십분 활용했다.

수십 차례의 가격 협상을 통해 주가순자산비율(PBR)을 2.6배로 맞췄다.

지난해 하반기 이탈리아 유니크레딧은행이 카자흐스탄 5위 은행인 ATF를 살 때의 단가 4.8배와 비교하면 절반에 불과하다.

국민은행은 BCC 투자를 통해 연간 20% 이상의 수익을 기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부동산가격 하락세가 둔화되고 있으며 외화부채 상환도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낙관론의 근거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 일각에서 제기된 고가 매입 논란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카자흐 내에서도 국민은행이 카자흐 금융산업 수준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메데트 사르트바이예프 카자흐스탄 중앙은행 부총재)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민은행은 BCC 인수에 만족하지 않고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단은 BCC를 카자흐스탄 선두권 은행으로 올린다는 것이 국민은행의 계획.바이세이토프 의장도 "국민은행의 높은 신용도와 앞선 기술을 활용해 BCC를 5년 내에 카자흐스탄 최고 은행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국민은행은 여기에다 BCC를 중앙아시아 러시아 동유럽 진출 카드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BCC는 이미 러시아 현지법인 아래 지점을 확대하는 방안을 짜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현지법인을 내는 것도 추진하고 있다.

알마티(카자흐스탄)=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