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재계의 눈과 귀는 온통 연말 인사에 모아진다.

'최고경영자(CEO)가 연임될 것인가,임원 승진 인사의 폭은 어느 정도일까 등을 놓고 나름대로의 관측이 무성해진다.

그리고 인사의 뚜껑이 열리면 환희와 실망이 교차한다.

그런데 올 연말 재계는 인사와 관련해 의외로 조용하다.

11월부터 사상 최대 규모의 사장단 및 임원 인사가 줄을 이었던 지난해와는 180도 달라진 분위기다.

대폭의 CEO 교체 소식도,임원 승진 파티 소식도,오너 2세의 경영권 승계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재계가 올 연말 예년과 다른 '조용한 인사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 수사의 영향이 크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비자금 의혹 수사 여파로 삼성이 인사 시기를 연기하고 규모도 당초 예상과 달리 소폭에 그칠 것으로 전해지자 다른 그룹들도 조심스런 인사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올 여름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던 한화그룹은 연말로 예정됐던 사장단 인사를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다.

현재 일본에 머물고 있는 김 회장의 귀국 일정이 잡히지 않은 데다 경영 복귀 시점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매년 12월 말께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지만 올해는 김 회장의 부재로 내년으로 미뤄질 전망이다. 집행 임원 및 직원 인사가 예정된 2월 초께 사장단 인사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따라서 2월 인사와 함께 김 회장이 자연스럽게 경영에 복귀하고 그룹 위기 상황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높다.

비자금 의혹 사건으로 위기를 맞은 삼성그룹의 경우 사장단 및 임원 정기인사를 삼성전자 주총 직전인 내년 2월 하순께로 연기했다.

당초 이건희 회장의 취임 20주년을 맞아 사장단 물갈이 등 큰 폭의 인적 쇄신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이마저도 소폭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위기 상황에서 혹시라도 '인사 불만'을 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현대·기아차그룹도 정몽구 회장이 최근 기자들에게 "아직 인사나 조직개편 계획이 없다"고 밝혀 올해 인사 시기 연기 및 규모 축소가 예상되고 있다.


[ 아직도 정기인사 하나 ‥ 두산 등 수시인사 ]

"어! 연말에 할 인사가 없네."

권영수 LG필립스LCD 사장이 최근 임원회의에서 던진 말이다.

올해 초 취임한 권 사장은 지난 1년간 조직개편과 수시 인사를 통해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상태.게다가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실적이 크게 개선돼 18일로 예정된 정기인사에서는 소폭의 임원 승진 인사를 제외하곤 별다른 인사 요인이 없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이 같은 수시 인사는 재계의 전반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인사 요인이 생길 때마다 시기를 가리지 않고 인사를 실시해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두산그룹이 대표적이다.

두산은 지난 6월 김기동 사장을 두산건설 대표이사로 선임했고,최근에는 성낙양 부사장을 ㈜두산 출판비즈니스그룹(BG)장으로 승진,발탁했다.

이같이 수시로 사장단 및 임원 인사를 실시하고 있는 만큼 두산은 아예 연말 인사 계획이 없다.

재계 관계자는 "아직 연말에 인사를 실시하는 그룹들도 '상시 구조조정 체제'를 갖추고 있는 데다,점차 수시 인사의 횟수와 폭을 늘리고 있어 이대로 가면 재계에서 '연말 정기인사'라는 말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실적 좋은 경영진 유임 '화답'‥금호.한진 등 일찌감치 내년사업 구상 ]

올 3분기까지 사상 최대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달성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이에 화답하듯 18개 계열사의 사장단을 모두 유임시켰다.

대우건설 서종욱 부사장과 금호생명 대표인 최병길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킨 게 사장단에서는 유일한 변화다.

한진그룹도 올해 대한항공이 2분기 미국 법무부에 3억달러의 과징금을 낸 것을 제외하면 영업실적이 좋아 정년 퇴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영진이 유임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휴대폰 사업의 부상으로 턴어라운드를 달성한 LG전자도 마찬가지.올해 초 선임된 남용 부회장과 각 사업본부장 등 최고경영진은 모두 자리에 남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능별 조직을 시장별 조직으로 바꾸는 조직개편 과정에서 일부 임원들의 보직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남 부회장이 1년 동안 그린 밑그림을 실행으로 옮기는 작업이다.

올해 초 이구택 회장의 연임(3년)이 결정된 포스코도 별다른 인사 요인이 없다.

지난해 5대 부문장 체제가 구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올해 경영 실적도 좋기 때문이다.

올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던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업체들도 올 연말에는 기존 경영진이 마음 놓고 내년도 사업 구상에 몰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회사구조 바뀐 기업 '대폭 인사'‥SK, 지주사 전환 ]

올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SK그룹은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이달 말 대대적인 임원 인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지주회사인 SK㈜의 인력을 정비하고 SK에너지,SK텔레콤 등 주력 계열사의 임원 조정 폭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SK는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SK에너지,SK텔레콤 등의 조직 개편도 검토하고 있다.

SK에너지는 내년 초 SK인천정유를 흡수 합병하기 때문에 중복되는 지원·관리조직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업조직을 구축할 방침이다.

SK텔레콤은 임기 만료되는 김신배 사장의 연임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7월 LG석유화학을 흡수 합병한 LG화학도 상당한 규모의 조직 개편이 예상되고 있다.

별도로 운영되던 2개의 회사를 하나로 합친 만큼 중복되는 지원·관리조직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규모의 경제를 통한 원가경쟁력 개선,투자여력 통합,구매 통합 등 합병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조직개편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LG화학은 임원 인사 및 조직 개편에 앞서 최근 박진수 전 LG석유화학 대표이사에게 석유화학사업본부장을 맡겼으며,㈜LG 출신의 한명호 부사장을 산업재사업본부장으로 보직 이동시켜 사업부문 사령탑을 재정비한 상태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