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5일(현지시간) 발언은 '경기보다는 인플레이션 억제에 중점을 두겠다'는 FRB의 의지를 분명히한 것으로 풀이된다.

경기 둔화 가능성을 감내하더라도 경계 수준을 넘어선 인플레이션 압력을 억제함으로써 미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하의 물가 상승) 상태로 빠져드는 걸 미리 차단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는 29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가 추가로 인상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날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금융회의에 패널로 참석한 버냉키 의장의 발언 골자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 경제의 성장 둔화가 시작됐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인내의 수준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엔 자칫 잘못하면 저성장하의 인플레이션 상태,즉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버냉키 의장은 이에 대한 해법으로 경기보다는 인플레이션 차단에 주력한다는 방침을 들고 나왔다.

버냉키 의장의 이 같은 태도는 종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이다.

FRB는 지난주 공개된 5월10일의 FOMC 의사록에서 경기둔화 가능성과 인플레이션 압력 증대 가능성을 동시에 지적하면서 "앞으로 금리 정책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나 이날 '인플레이션 압력 차단'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통화 정책의 방향성을 분명히했다.

사실 최근 미국 경제는 경기 둔화와 인플레이션 압력 증대 가능성이 겹쳐 상당히 혼미스런 양상을 보여왔다.

지난주 발표된 '5월 고용 동향'은 미국 경기가 예상 외로 빨리 둔화되고 있음을 나타냈다.

5월 중 비농업 부문에서 창출된 일자리는 7만5000개에 불과했다.

당초 시장 예상치였던 17만4000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버냉키 의장도 이날 "5월 고용 보고서 등 많은 경제지표들이 성장 둔화를 예시하고 있다"며 경기 둔화 시각에 동의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플레이션은 FRB의 용인 범위를 벗어났다.

에너지와 식품을 제외한 핵심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 3개월간 3.2%,6개월간 2.8% 상승했다.

또 개인소비지출(PCE)도 3개월과 6개월 새 각각 3%와 2.3% 올랐다.

이는 FRB가 용인할 수 있는 2%를 넘어선 수준이다.

버냉키 의장은 "최근 핵심 인플레이션 압력은 장기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물가 안정 범위의 상단부에 위치해 있거나 벗어난 것"이라며 "핵심 인플레이션 상승이 지속되지 않도록 경계할 것(vigilant)"이라고 강조했다.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인플레이션 억제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취임 후 가장 분명한 어조로 천명한 셈이다.

이에 따라 FRB의 긴축 정책은 당분간 지속될 공산이 커졌다.

이날 시카고 선물시장에서 연방기금 금리 가격은 오는 29일 FOMC가 금리를 추가 인상할 확률을 종전 48%에서 72%로 높여 반영해 형성됐다.

추가 금리인상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증시도 자연스럽게 타격을 받게 됐다.

고유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경기 둔화에다 금리 인상이 겹치는 최악의 여건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론이 없지는 않다.

버냉키 의장이 29일 열리는 FOMC에서 금리를 동결하기 위해 강한 톤으로 인플레이션 차단을 역설하고 나섰다는 시각이다.

'금리를 동결하더라도 인플레이션 억제를 포기하지 않은 만큼 확대 해석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냉키 의장의 FRB가 경기 둔화보다는 인플레이션 압력 증대를 더 우려하고 있다는 시각을 확실히했다는 점에서 당분간 미국 경제와 뉴욕 증시는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전망이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