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동남쪽으로 1백50km 떨어진 마이테네스 지역.안데스 산맥의 허리에 놓인 해발 3천5백m급 세로네그로산 중턱에선 동광석 캐내기가 한창이다.


폭과 높이가 각각 6m인 캄캄한 갱도는 14개층을 이루며 미로처럼 수없이 얽혀 있고,중간중간 커다란 광석덩어리를 잘게 빻는 기계의 절구질 소리가 요란하다.


18곳의 통풍구를 통해 갱도에 하루 4백50만㎥의 공기를 불어넣는다지만 자욱한 먼지 탓에 안전모에 붙은 전등의 불빛만으론 지척도 분간하기 어렵다.


광산개발에 착수한지 올해로 1백년을 맞는다는 엘 테니엔테 광산.칠레 국영 광산업체인 코델코의 소유인 이 광산은 지금까지 파낸 갱도 길이가 2천4백km에 이른다.




< 사진 : 칠레 국영광산업체 코델코의 직원이 엘 테니엔테 광산 갱도에서 각종 동광석 종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1백년 역사를 가진 이 광산에서는 지금도 연간 34만t의 동광석을 캐내고 있다.이 곳은 갱도 입구에서 10km나 파고 들어간 곳이다.엘 테니엔테 광산에서 채굴된 동광석은 8km 떨어진 제련소에서 고품위 정광으로 거듭난다. >


"책임자요? 출장 가셨는데요."


출장이라니.인터뷰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서울에서 30시간을 날아왔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근로자들 외에는 딱히 만나줄 사람도 없다는 말에 맥이 풀렸다.


"2∼3년 전부터 방문객들이 크게 늘었습니다.아시아,특히 한국 중국 손님들이 많아졌지요.하지만 '미스터 정'처럼 광산만 둘러보는 정도입니다."


이 회사에서 정년 퇴직한 뒤 광산 투어회사를 차렸다는 로모로 기라도씨도 동양의 이방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원 부국의 콧대가 높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동광산 개발프로젝트를 위해 2002년부터 코델코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대한광업진흥공사도 상대방의 높은 콧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광진공은 코델코에 수 차례에 걸쳐 공동 개발을 제의하고 있지만 "법규상 외국사와의 합작은 곤란하다"며 꼬리를 빼고 있다.


펠프스 닷지라는 미국 거대기업에는 엘 아브라 광산의 지분을 51%까지 내줬으면서도 말이다.


한국이 세계 4위의 구리 수입국이라는 사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광진공은 지난해에도 산티아고 북쪽 1천5백km 부근에 구리 경제성 분석을 끝낸 '가비 프로젝트' 정보를 입수하고 코델코측과 공동 개발을 제의했다.


그러나 차일피일 협상을 미루던 코델코는 "국제경쟁 입찰에 부치겠다"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모두 없었던 것으로 백지화해 버렸다.


중국 같은 신규 수요자들이 몰려드는데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


칠레 광업부 토머스 아스토가 슈나이더 국제담당국장은 "칠레는 개방정책을 펴고 있어 누구든지 투자할 수 있다"면서도 "양자관계에 있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이 구리를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원 부국의 '배짱 퉁기기'는 세계 어느 곳에서고 마찬가지다.


지난 연말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


한국석유공사 곽정일 부장은 국영석유회사 카즈무나이가스의 바티르바예프 부사장을 만나러 갔다가 냉대를 받았다.


그의 첫 마디가 "10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였다는 것.


인천공항에서 알마티를 거쳐 아스타나로 날아온 비행시간만도 11시간.전날도 하루 종일 호텔방에 앉아 전화벨 소리만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날 겨우 면담이 성사됐지만 바티르바예프 부사장의 결론은 "하루에도 수십명씩 찾아오니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뿐이었다.


만나기만 어려워도 괜찮다.


모든 것이 돈이다.


카자흐스탄은 각종 명목을 내세워 뒷돈을 요구하고 있다.


곽 부장은 "몇 만달러대에 불과하던 사이닝 머니(탐사계약시 관례상 지불하는 돈)가 최근 카스피해 카샤간 광구의 경우에는 1억5천만달러까지 치솟았다"며 "자원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지분 참여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더욱이 카자흐스탄은 지난해부터는 체결되는 모든 유전개발 계약에 매출액의 최대 33%까지 수출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든 해상유전에는 카자흐스탄 국영석유사인 카즈무나이가스가 50% 이상 지분을 참여토록 의무화했다.


나머지 50% 지분도 탐사전에 20%만 주고,유전이 발견돼 가격이 오르면 30%를 추가 매입토록 하는 등 외국 기업의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15-1광구에서 석유를 캐내고 있는 한국석유공사와 SK㈜ 컨소시엄은 광구권 계약을 체결할 때 1천5백만달러를 '사이닝 보너스'로 베트남 정부에 지급했다.


보너스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 첫 상업생산 때 3백만달러를 지급했고 2만,5만,10만,15만배럴을 생산할 때마다 2백50만∼6백50만달러의 뭉칫돈을 떼줘야만 했다.


국내 기업과 베트남의 합작사인 꾸롱의 한 관계자는 "탐사에 성공해 대박을 터트리면 아깝지 않지만 실패하면 고스란히 날라가는 돈"이라며 "최초 광구권 계약을 맺을 때 이런 보너스 조항이 적어도 10개 이상 들어가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졌다"고 말했다.


자원 부국의 콧대가 높아질수록 자원 빈국의 '설움'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아스타나(카자흐스탄)=김병일.산티아고(칠레)=정태웅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