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인수 희망업체들간의 물밑 신경전이 한창이던 지난 12월초. 국내 T그룹의 최 모 회장은 창원 본사 사무실에서 제출할 예정이었던 인수제안서를 찢어버렸다. 국내 자동차 부품업체들을 모아 컨소시엄을 형성하고 필요한 돈은 금융회사에서 빌려 쌍용차를 인수, 국내 기업으로 살려 보려고 했던 계획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입찰 관계자들은 쌍용자동차가 미국과 유럽(르노, 시트로앵), 중국(란싱그룹, 후이쭝) 등 각국 주요 자동차업체들의 경합대상이 돼 국내 기업이 상대하기에 자금면에서 버거웠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한 고위 관계자는 "아마 T그룹의 돈이 충분했더라도 쌍용차 인수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국내 기업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는 것을 '재벌 비대화->경제형평성 저해'라는 도식에 젖어 있는 정부가 반길리 없고, 은행들쪽에서도 리스크를 져야 할 파이낸싱을 꺼렸을 것이란 설명이다. ◆ 반독점ㆍ금융논리에 실종된 산업정책 정승일 대안연대 정책위원은 "쌍용자동차 매각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채권단은 빨리 관리 기업을 털어내려고만 하고 정부는 장기적인 산업정책 없이 이를 방관하고 있다"며 "이런 상태에서는 금융부문에 이어 핵심 제조업까지 외국자본에 줄줄이 넘어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주요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외국 기업에 경영권이 넘어간 국내 주요업체(또는 사업부문)만도 30개(매각대금 1천만달러 이상)를 웃돈다. 신종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는 "이 중에는 성공적인 외자유치 케이스도 있지만 적지 않은 국내 기업이 정부와 채권단의 성급한 결정속에 외국자본에 헐값 매각됐다는 의혹을 씻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 금융논리에 포획당한 관료집단 조환익 산업기술재단 총장은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정부내에서 금융 세제분야의 논리가 판을 치면서 장기적인 산업정책에 따른 구조조정 필요성을 개진할 여지가 거의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예컨대 주력산업 품목인 반도체 산업보호를 위해 하이닉스 매각 때 산업자원부가 이례적으로 "헐값에 매각하느니 독자생존시키자"는 목소리를 냈지만 청와대와 금융당국쪽에서 "정부가 산업을 주물렀던 60∼70년대로 회귀하자는 것이냐"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바람에 '없었던 얘기'가 돼버렸다는 것. 금융논리의 '득세'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는 해도, 김대중 정부 이후 역대 산업자원부 장관이 재무관료나 학계 출신 중에서 연이어 임명되는 등 산업정책적 관점은 '논외(論外)'로 밀려버린 측면이 강했던게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들어서도 청와대 파견 부처별 행정관이 재정경제부는 20명인데 반해 산업자원부는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여전히 '금융논리'에 압도당하고 있는 분위기다. ◆ 역차별적 조항 개선 시급 이런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각종 역차별적 규제에 발이 묶여 있고, 그 틈을 비집고 외국자본이 나래를 펴면서 핵심 기업들이 장내외 주식거래를 통해 잇달아 외국인들의 손에 '접수'되고 있다. 은행법상 국내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의결권 제한(4%)규정이나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제도(자산 5조원이상 대기업집단 소속 계열사들은 순자산의 25%를 초과해 다른 기업에 출자할 수 없도록 한 규정) 등은 대표적인 역차별 규정으로 꼽힌다. 지난 4월 영국계 투자펀드인 소버린이 SK그룹의 지주회사격인 SK㈜의 지분을 집중 매입, 경영권을 노린 것은 출자규제의 역차별성을 교묘히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 외국자본 '천사표' 아니다 외국 자본 가운데 지나친 단기 수익위주 경영과 노골적인 '투자원금 회수작전'으로 비판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JP모건이 최대주주로 있는 ㈜만도가 올 예상순익을 웃도는 1천억원어치의 자사 주식을 매입, 유상소각하는 방식으로 주주들에게 돈을 나눠줘 '도덕적 해이' 논란을 빚고 있는게 대표적 사례다. 비상장 회사인 만도는 지난 22일 기존 발행주식 1천만주 가운데 3백42만주(33.46%)를 JP모건 등 주주들로부터 매입한 뒤 유상소각했다. 주당 매입 가격은 2만9천2백원으로 총소각금액이 1천억원에 달했다. 올해 예상되는 순이익 9백50억원을 웃도는 수준. 이에 따라 최대주주인 JP모건(지분율 76.07%)은 5백14억원, 2대주주인 한라건설측 대주주(19.52%)는 1백38억원, 오상수 사장 등 임직원과 기타 주주(4.30%)는 28억원의 차익을 챙겼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만도 노조가 '이익배분 형평성'을 내세워 올해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배분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박수진 기자 park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