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10일 미국 보스톤의 리츠 칼튼 호텔 429호실. 크레이그 스펜서라는 이름의 한 사나이가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었다. 사인은 자살로 판명됐다. 당시 49살의 스펜서는 신용카드 사기극을 벌여 물의를 일으킨 동성애자 매음단의 일원이었던데다 코카인과 불법무기를 소지한 혐의로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법정에 서면 중형이 불가피한 죄질이었다. 게다가 스펜서는 불치병인 에이즈에 걸려 증세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언론들은 신병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나중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스펜서는 일본무역진흥회(JETRO) 등 일본 정부에 고용된 스파이였다. 그는 미국 백악관과 국회의 고위직 인사들의 약점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스스로 남창의 세계로 걸어들어간 인물이었다. 스펜서의 후견인은 일본의 통상산업성을 창설한 자민당의 원로급 지도자 시나 에쓰사부로였다. 스펜서는 1979년 통상산업성과 일부 대기업들이 출연한 정책연구그룹(PSG)의 워싱턴 대표를 맡으면서 일본 정부의 눈과 귀 역할을 해냈다. 물론 중요한 정보가 건네지면 수만달러의 사례금이 뒤따랐다. FBI(미연방 수사국)의 조사결과 스펜서가 죽기 직전 일본 측이 '거래'를 단절했다는 징후가 포착됐다. 일본 측은 스펜서가 매음 등의 혐의로 사법당국의 추적을 받는데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스펜서가 타살된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됐지만 그것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남창을 드나드는 미국 고위관리들의 명단이 일본 정부에 넘어갔다는 사실이었다. 한편의 첩보 미스터리물을 방불케 하는 이런 일들이 요즘도 서울 강남 한 복판의 룸살롱 등에서 벌어진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공작의 무게중심이 정치정보 대신 경제·기업관련 정보로 옮겨졌다는 것 외에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국가정보원은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는 외국 정보기관과 기업 대부분이 공식·비공식적,합법·비합법적으로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믿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민감한 외교적 관계를 감안해 구체적 사례를 제시할 수 없다"면서도 "외국정부가 산업스파이를 고용할 때는 몇 단계를 거쳐 점조직같은 형태로 운영한다"고 말했다. 외국 정부가 국내 산업정보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메모리반도체 LCD 휴대폰 디지털TV처럼 국내 기업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전략 품목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IMF사태 이후에는 다국적 브랜드를 갖고 있는 경영컨설팅사를 통해 산업기밀을 빼가는 사례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기업들이 각종 컨설팅과 경영자문을 통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다퉈 도입하는 와중에 중요한 경영정보들이 넘어갔다는 것. D기업 관계자는 "지난 몇년간의 경험을 통해 이같은 경우를 잘 알고 있다"며 "요즘은 경영 컨설팅을 받을 때 모든 경영정보를 노출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