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핵심 국정 과제로내세웠던 참여정부의 출범 첫 해도 벌써 저물고 있다. 그러나 출범 당시의 거창한 구호와 달리 지난 1년은 시장 개혁 추진의 당위성과'개혁 속도 조절론'이 충돌을 거듭한 한 해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뚜렷한 진전은 눈에 띄지 않는 게 사실이다. 다만 더 이상 '관치와 재벌'로 상징되는 개발독재 의 유물에서 벗어나지 않고는시장 질서를 구축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어느 때보다도 넓어진 점, 그 과정에서 '시장 개혁 로드맵'이라는 작품이 나온 것이 그나마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당위성 Vs 현실론' 충돌 속의 1년= 재벌과 금융 분야 개혁을 표방한 참여정부는 출범부터 '어려운 경제 사정'을 내세운 재계의 집요한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올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당시 재계의 '입' 노릇을 하던 전경련 김석중 상무가 외신을 통해 새 정부의 정책을 '사회주의'로 규정한 사건은 시장 개혁에 대한 재계의 시각을 드러낸 전형적 사건이자 재계가 시도한 '기선잡기'의 서곡에 불과했다.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나갈 토양도 척박했다. 지난해 6%대에 달하던 경제성장률이 연초부터 급전직하하는 가운데 무리한 경기 부양의 후폭풍으로 불어온 카드사 사태,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동산까지 상황은 오히려 '개혁 속도 조절론'의 편이었다. 재계의 반발로 4월에 착수하려던 삼성, LG, SK 등 6대 그룹 부당 내부거래 조사가 한때 무기 연기되고 뒤늦게 실시된 조사 결과가 당초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자참여정부의 재벌 개혁이 출범 반 년도 못돼 좌초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4월 재벌계 카드사 중심의 카드 위기 수습책이 발표되자 대표적 재벌 개혁론자인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공개석상에서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개혁을 포기했으며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관료들에게 모든 게 넘어갔다"는 독설을 쏟아내기도 했다. ◆미궁에 빠진 시장 개혁 청사진= 어려운 경제 상황이 개혁 의지를 손상했다면향후 추진 전략 마련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 부처간의 엇박자는 미래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4월부터 공정위의 '공정한 시장 질서 구축 태스크포스'와 재경부의 '산업자본의금융 지배 방지 태스크포스'의 두 축으로 나뉘어 진행된 정부의 개혁 로드맵 정립작업이 발표를 목전에 둔 지금까지도 재벌 계열 금융사들의 의결권 행사와 같은 핵심 사안에 대해 쟁점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게 단적인 예다. 아울러 3년을 끌어온 증권집단소송제는 무리하게 강화된 소송 요건과 대상의 제한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용도 폐기 직전이라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다만 공정위가 10월 말에 내놓은 시장 개혁 로드맵은 새로운 개념인 의결권 승수를 바탕으로 '총수의 과도한 지배력 축소'라는 재벌 지배구조 문제의 핵심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시장 개혁 3개년 계획'조차 적절한 목표 제시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철할 강력한 수단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는 미완의 청사진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 11월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 정부와의 연례협의에서 시장 개혁 로드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목표를 달성할 수단이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도 "로드맵이란 세부 실행 대책을 갖춘 계획들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인데 시장 개혁 로드맵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로드맵이라기보다는 비전에 가까운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태풍의 눈', 검찰발 재벌 개혁= 경제 부처가 주도하는 시장 개혁 노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과 달리 연초부터 재계를 들쑤셔 놓은 '검찰발(發) 재벌 개혁'은 국민의 시선이 온통 집중될 정도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정치자금 관련이 아니면 재벌에 침묵을 지키던 검찰은 올 2월 참여정부 출범 벽두부터 SK그룹 분식 회계와 총수의 배임 사건에 메스를 들이댄 데 이어 성역화돼 있던 최대 재벌 삼성의 경영권 상속 문제에까지 개입하기 시작했다. 삼성을 검찰에 고발했던 곽노현 방송대 교수(법학)가 검찰에 보낸 공개 서한에서 "총수의 계열사 노략질이 선을 넘으면 배임죄로 다스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증여세 추징이나 과징금 부과 등은 정의에 반하거나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한 것과 최근 검찰의 동향은 향후 재벌 개혁에서 검찰의 역할이 더 커질 것임을 시사한다. 검찰의 수사가 비록 '경제를 망친다'는 재계의 여론몰이에 포위당한 데다 '개혁의지 과시용'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지만 적어도 재계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2004년 벽두에도 '검찰발 재벌 개혁'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서울=연합뉴스) 김종수기자 jski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