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이라는 용어의 발생지는 일본이다. 권력을 가진 정치권과 경제계가 자신들의 이익도모를 위해 서로 코드를 맞추고 흥정과 거래를 일삼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기업활동과 산업화의 역사, 속도가 아시아에서 가장 빨랐던 국가가 일본인 점을 고려한다면 정경유착은 20세기 일본에서 태어나 다른 나라로 퍼진 저질 문화상품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경유착의 원산지 일본의 최근 사정은 영 딴판이다. 돈을 고리로 한 정치권과 경제계의 밀월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개인 차원의 뒷돈이 은밀하게 오갈 가능성은 남아 있어도 선거를 치른다며 정당들이 조직적으로 거액을 뜯어내고, 기업은 보험료 성격의 뭉칫돈을 덥석 내주는 법이 없다. 재계가 게이단렌(經團連)을 창구로 정치권에 제공해 왔던 헌금도 지난 93년 중단됐으며 개별기업들의 공개 헌금도 해마다 규모가 줄고 있는 상태다. 특정 기업으로부터 정치권에 건네지는 돈의 단위가 수백억원에 이르고, 기업들은 정치판이 요동칠 때마다 사회적 지탄과 형사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한국적 현실과 180도 다른 문화다. 마치 악성 돌림병을 퍼뜨린 환자가 자신만 완쾌된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다. 그러나 오늘의 일본에서는 21세기형 정경유착의 새로운 문화가 탄생을 앞두고 있다. 재계 주도의 정치개혁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정치에는 돈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전제하에 투명한 정치, 올바른 정치, 생산적인 정치가 가능하도록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돈을 주되 정책, 정강을 따져가며 공개적으로 주고 국가와 경제발전을 위해 요구할 것은 당당히 요구하겠다는 계산인 셈이다. 2004년 시행 목표… 10개 평가 항목 공개 일본 최대의 경제단체인 니혼게이단렌은 정치헌금 재개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연초부터 거듭 표명해 온 데 이어 2004년 시행을 목표로 막바지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를 위해 정당 평가의 잣대가 될 10개 항목을 지난 9월 말 공개했으며 이를 토대로 전문가들과 구체적인 평가작업을 진행 중이다. 게이단렌이 발표한 10개 항목은 세제개혁, 사회보장, 행정개혁, 과학기술진흥, 고용촉진 및 교육개혁, 환경정책 등을 망라하고 있다. 각 정당의 이념, 정책, 실현가능성 등을 비교, 분석한 후 헌금의 가이드라인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게이단렌이 여론의 비판 우려를 각오하면서도 정치헌금 재개를 적극 추진해 온 데는 정치권의 무능과 구태에 대한 재계의 부정적 시각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오쿠다 히로시 게이단렌 회장을 비롯한 재계 고위 인사들은 정치권이 산적한 국가적 현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위기를 증폭시킨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금융시스템 불안, 재정 적자, 흔들리는 사회보장 등 국가경쟁력을 위협하는 악재가 수두룩한데도 정치권은 소모적 정쟁에만 매달려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는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오쿠다 회장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수년간 정책 제안을 수없이 했지만 실행에 옮겨진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는 말로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게이단렌측은 “돈으로 정치를 좌우하려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정책 본위의 정치문화 정착에 일조하겠다는 것일 뿐 ‘유착’과는 다르다”며 정책 중시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과거 정치헌금과의 차별성 부각을 위해 ‘헌금, 알선’이라는 용어 대신 ‘기부’라는 말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다. 사회봉사와 공헌활동 등에 흔쾌히 제공하는 돈처럼 올바른 정치, 국익을 위한 정책 본위의 정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부 행위로 생각하고 자금을 내겠다는 것이다. 재개될 정치헌금이 정치권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정치문화를 바꾸는 데 어느 정도의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평가 항목에 따른 가이드라인만 제시할 뿐 게이단렌이 직접 돈을 걷어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이상 개별기업들이 게이단렌의 방침에 얼마나 호응하고 따를지 또한 의문이다. 그러나 게이단렌은 결과를 낙관하는 분위기다. 오쿠다 회장은 “양측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부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건전한 기부로 생각한다”며 “(정치헌금을) 경제계와 사회 전체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행위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게이단렌은 히라이와 가이시 전 회장 시절인 지난 93년 가네마루 신 전 자민당 부총재의 거액 탈세사건과 리크루트 스캔들 등으로 정경유착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들끓자 정치헌금을 중단했다. 그후 개별기업과 단체에 의한 헌금이 중심을 이뤄왔지만 규모는 최근 5년간 계속 내리막길을 걸으며 2001년 총 207억엔에 머물렀다. 한편 지난 6월 자민당이 중심이 돼 개정한 정치자금법은 동일 기업, 단체에 의한 특정 정당 지부 헌금이 연간 150만엔(약 1,500만원)을 넘지 못하도록 돼 있다. yangsd@hankyung.com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자금 제공할 것” “언론에서는 게이단렌이 정치헌금을 재개한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정치자금 기부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정당에 직접 주는 것도 아니고 자금 제공은 어디까지나 개별기업의 판단에 맡길 뿐입니다.” 정치헌금 재개의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와다 류코 일본 게이단렌 사무총장(66)의 주장은 분명했다.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차분했지만 어둡고 침침한 이미지로 가득 찼던 과거의 정치헌금 행위와 달리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공개적 기부라고 그는 힘줘 말했다. 10년 가까이 중단됐던 정치헌금을 재개하려는 배경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큰 것 같다. 헌금이라기보다는 기부 행위로 봐 달라. 정치가 정당교부금 등 정부에서 나오는 돈에만 지나치게 의 존하면 정당정치의 본래 모습이 일그러진다. 정치권이 정부의 호주머니만 쳐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주성, 자립성이 훼손당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치권에 자기 돈이 풍부한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점을 보완, 생산적이고도 건전한 정치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한다는 생각으로 정치권에 자금 제공을 생각하게 됐다. 재계가 돈이라는 무기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비판의 우려는 없는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해서도 게이단렌은 공개적이고 투명한 절차와 원칙에 따라 자금 제공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각오다. 자금 제공까지의 모든 과정과 판단 기준을 오픈하고 돈을 지원받을 정당을 원칙적으로 가리지 않겠다. 정당의 정책과 이념을 평가해 게이단렌이 설정한 기준에 맞는 곳에 자금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돈을 주는 과정에서도 게이단렌은 창구 역할 등을 하지 않는다. 주고 싶은 기업이 자사의 판단에 따라 능력껏 제공하면 그뿐이다. 게이단렌의 정치헌금 재개(정치 기부)가 정치개혁에 기대한 만큼의 상당한 효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보는가. 정당 본부(중앙당)의 자금 사정이 충실해지면 정치인들도 그만큼 더 (한눈팔지 않고) 정치활동에 전념하는 풍토가 만들어질 것이다. 음성적인 자금조성을 둘러싼 논란과 잡음, 수고도 한결 줄어들 것이다. 투명한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정당 본부에 제공하는 돈을 개별 정치인에게 불법으로 쥐어주는 자금문제와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게이오대 경제학부와 대학원 경제학연구과를 졸업한 후 1964년 4월 게이단렌에 몸담은 와다 사무총장은 39년을 게이단렌에서만 일해 온 일본 현대기업사의 산증인이다. 오쿠다 히로시 회장을 보좌하면서 게이단렌의 내부 살림과 대외활동을 총지휘하고 있다. 니혼게이단렌의 정당평가 항목 경제회생,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한 세제개혁 △사회보장개혁 △규제완화, 행정개혁 △과학기술 입국 실현을 위한 환경정비 △에너지 전략, 환경정책 △교육개혁 △교통, 취업촉진 △도시, 주거환경 정비 △지방자립촉진제도 △통상, 투자, 경협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