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원플러스(대표 원일식ㆍ54)에 들어서면 기념비가 하나 우뚝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지난 96년 5월20일 남동공단에 입주하면서 세운 것으로 회사의 발전을 위해 열정을 쏟겠다는 다짐과 초창기 멤버 20명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창업을 하면서 전직원이 "5년 뒤 우리의 공장을 갖자"며 한 약속을 지킨 것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원일식 사장은 "기념비를 볼 때면 희망이 용솟음친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성이 고향인 원사장은 2남5녀 중 막내로 엄부 밑에서 자랐다. 교장선생님이었던 부친은 원사장이 교사가 될 것을 바랐지만 그는 엔지니어의 길을 걷기로 하고 한양대 전기공학과에 들어갔다. 원사장은 학사장교로 해병대를 제대하던 76년 9월 엘리베이터를 생산하는 한ㆍ일합작 업체인 유니버스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이후 여러번의 인수과정을 거쳐 금성기전(현 LG산전)에 흡수됐다. 이전 회사에서 엘리베이터 설계를 주로 해왔던 원사장은 금성기전에서는 배전반 설계를 맡다 CAD/CAM실이 신설되면서 이 업무를 맡게 됐다. 당시 CAD/CAM은 국내 기업들이 막 도입하려던 초기단계였다. 원사장은 8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CAD/CAM 전문업체인 칼마에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회사에서 3명을 선발하는 데 50여명이 응시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 뽑혔어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미국 연수기간에는 하루 종일 교육실과 실습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도 밤을 새워가며 책과 씨름했다. 밤을 새울 때는 야참으로 라면을 끓여먹으며 고단함을 달래기도 했다.82년 4월 3개월간의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원사장은 책임자로 CAD/CAM실을 이끌었다. 원사장은 87년 7월 퇴사할 때까지 금성기전의 생산제품에 대한 설계표준화를 정착시키는 데 앞장섰다. 원사장이 창업에 나서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는 의외로 소박했다. "언젠가 뜬금없이 퇴직금을 정산해 보니 980만원밖에 안되더군요.10년 동안 장사를 해도 이보다 더 벌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회사를 뛰쳐나왔죠." 사업을 하려고 했지만 원사장 앞에는 걸림돌이 놓여 있었다. 법인 설립을 위한 자본금 5,000만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퇴직금과 주변에서 끌어모은 종자돈이라고 해야 3,000만원이 전부였다. 파트너를 찾는 등 자금마련을 위해 이리저리 뛰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원사장은 사업을 포기하고 직장인으로 돌아갔다. 그해 9월 전력용 감시제어반 생산업체인 보정씨앤아이에 들어가 89년 6월까지 다녔고 이후 91년 2월까지 배전반 생산업체인 대주전기에서 마지막 직장생활을 했다. 원사장은 대주전기 근무 당시 회사 대출보증을 선 것이 문제가 돼 훗날 창업 후 9,000만원을 변제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억원의 창업자금을 마련한 원사장은 91년 5월 인천 간석공단에 조그마한 임대공장을 마련하고 직원 8명과 함께 사업출사표를 던졌다. "처음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업들을 쫓아다녔는데 신생업체라고 납품주문을 하는 곳이 없더군요.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도 바빴죠." 원사장은 일감이 없자 홍수로 물에 빠져 고장난 배전반을 수리해주는 일로 근근이 회사를 꾸려나갔다. 돈벌이는 안됐지만 최선을 다해 수리해줬다. 이러한 원사장의 열성이 인근지역 기업에 알려지면서 수주가 늘기 시작했다. 그는 "창업 4개월이 지나서야 주택공사로부터 아파트용 전력중앙감시반 1세트를 수주했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고 회상했다. 하루가 다르게 주문물량이 늘어나자 원사장은 96년 5월 7억원을 들여 남동공단에 430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고 공장을 지었다. 이곳에서는 감시제어반 외에 배전반 생산을 시작했다. 직원도 30여명으로 늘고 매출도 쑥쑥 커져갔다. 하지만 IMF 때 최대 고비를 맞았다.98년 건설업체들이 잇따라 부도가 나면서 연간 매출액과 맞먹는 6억8,000만원이 휴지조각이 돼 돌아왔다. 원사장은 회사를 살릴 생각으로 사방으로 뛰었다. 은행에 달려가고 거래처를 찾아가 매달렸다. 기업은행에서 어렵싸리 받은 대출금 5억원으로 쓰러져가는 회사를 살릴 수 있었다.원사장은 "직원을 줄이고 상여금을 감액할 때 직원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며 가슴아팠던 당시 심경을 털어놓았다. 원사장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었다.1년 뒤인 99년부터 회사는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매출도 성큼성큼 늘어갔다. 원사장은 배전반과 감시제어반 분야에서 기술경쟁력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분야를 위한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원플러스는 중소기업치고는 드물게 매출액의 4% 가까이를 연구개발비에 투입하고 있다. 원사장은 "연구개발에서 실패의 쓰라림도 맛봤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것이 각종 모터의 진동감지장치로 쓰이는 회전기. 원사장은 회전기 개발을 위해 지난 1년 동안 수억원을 투입했지만 개발을 못해 중단한 상태라고 밝혔다. 이 제품은 외국에서 수입해 쓰고 있어 국산화가 필요한 제품이라는 게 원사장의 설명이다. 또 전자식 가로등 안정기도 4년째 개발하고 있다. 지금까지 3억5,000만원을 투입했지만 풀세트로 나와야 할 3품목 중 2품목만 개발한 상태다. 원사장은 "기술 장벽을 넘지 못해 개발실에서 아직도 연구 중인데 늦어도 내년 6월께는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전자식 가로등 안정기는 기존의 자기식 가로등 안정기에 비해 전력사용량을 10% 이상 절감할 수 있는데다 가볍고 재활용이 가능해 친환경적인 상품이라는 게 회사측의 설명이다. 현재 35W와 70W 등 소용량 제품은 개발을 마쳤고 150W 이상 대용량은 개발 중에 있다. 원플러스는 내년부터 중국시장도 공략하겠다는 계획이다. 원플러스 직원들은 지난 10월 초 2박3일 일정으로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원사장은 "중소기업 직원들이 해외를 다녀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직원들이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원플러스는 올해는 지난해보다 10% 신장된 60억원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원사장은 "기념비는 나에게 용기를 준다"며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032-818-6011) 이계주ㆍ한국경제 벤처중기팀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