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부정, 과다한 보수지급 등에 반발하는 주주운동이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영국의 기관투자가들이 경영진 인선을 놓고 기업 이사회와 정면대결도 불사하는 등 경영감시자로서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경영 개입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기관투자가들의 이같은 방향 전환은 기관투자가의 권한과 한계를 둘러싼 새로운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의 경영 개입과 관련한 가장 최신 사례로는 투자펀드인 피델리티인베스트먼트와 영국 최대의 미디어그룹인 카턴 커뮤니케이션스의 마이클 그린(55)회장 사이에 벌어진 근 한 달 간의 대결이 꼽힌다. 그린 회장은 이달 초 같은 미디어 전문 기업인 그라나다와 46억 파운드 규모의합병계약을 성사시켜 영국 최대 민영방송인 ITV 지분을 절반 가까이 소유한 초대형미디어그룹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린 회장은 이런 공로로 카턴-그라나다 합병 법인의 최고 경영자로 내정이 됐지만 런던 기관투자가들의 반발이라는 예기치 못했던 복병을 만났다. 막판까지 반전을 시도하던 그린 회장은 그라나다 이사회조차도 지원을 거부하자기관투자가들의 요구에 굴복해 지난 22일 합병 작업이 완료된 즉시 사임할 것임을약속했다. 그린 회장은 카턴을 영국의 가장 강력한 미디어 그룹으로 키워냈지만 ITV 디지털방송 투자를 주도해 10억 파운드를 날리면서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겼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린 회장 퇴진운동을 주도한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는 "실패한 경영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당연한 일로 환영한다"는 반응을 내놨다. 카턴 이외에 위성방송 B스카이B, 슈퍼마켓체인 세인스버리, 바클레이스은행 경영실적이 부진한 영국의 주요 상장기업들이 최고경영진 인선을 놓고 기관투자가들과대결하고 있다. 특히 영국 상장주식 시가총액의 4분의 1을 좌우하고 있는 보험업협회와 다국적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대주주로 있는 위성방송 B스카이B 이사회의 대결은 공룡들끼리의 승부라는 점에서 벌써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B스카이B 이사회는 다음달 물러나는 토니 볼 최고경영자(CEO)의 후임으로 머독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의 둘째 아들 제임스 머독(30)을 내정했지만 보험업협회는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기관투자가는 파이낸셜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제임스 머독의B스카이B 최고경영자 임명은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매우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 관 건은 그가 모기업인 뉴스코퍼레이션의 이해에 반해 B스카이B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보험업협회는 23일 회원사들에 발송한 행동지침을 통해 다음달 열릴 B스카이B주주총회에서 제임스 머독의 CEO 선임 건을 부결할 것을 촉구, 표 대결도 불사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B스카이B는 일단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물밑 협상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의 기관투자가들은 이밖에도 실적이 부진한 슈퍼마켓업체인 세인스버리와바클레이스은행 등에 대해서도 CEO를 교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주에게 이익을주지 못하는 경영자는 주주가 갈아치워야한다는 논리다. 이런 움직임과 관련, 모렐리 펀드 매너지먼트의 유럽주식 담당자인 마이크 비숍은 "주주운동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기업 경영관행에 항구적 변화를 가져올 진전이 이뤄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경영계 일부에서는 경영자들이 기관투자가들에게 휘둘려 단기적인 이익및 배당 증대에만 골몰하는 등 `경영의 독립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런던=연합뉴스) 이창섭특파원 lc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