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계 최대 반도체기업인 인텔의 크레이그 배럿 최고경영자(CEO)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 지역에서 IT표준을 만들겠다는 한ㆍ중ㆍ일 3국 정부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ㆍ중ㆍ일 정부가 반(反)MS라고 해야 할 개방형 소프트웨어인 리눅스PC 운영체제(OS)를 기반으로 한 응용소프트웨어 개발을 비롯 차세대 IT표준 논의에 공동 대응키로 합의한 데 대한 역외 기업의 첫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생각하면 남의 좋은 일에 재나 뿌리자는 심사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MS 운영체제 윈도와 인텔의 이른바 '윈텔동맹'을 기억한다면 그럴 수 있다. 더욱이 지금은 차세대 IT표준을 두고 기업들간 합종연횡이 어지러울 정도이니 신경이 안 쓰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ㆍ중ㆍ일이 차세대 IT분야 표준제정에 공동전선을 구축할 경우 국제적인 발언권이 크게 높아질 것"이란 정보통신부 관계자의 전망대로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시장은 생각보다 변수가 훨씬 많다. 솔직히 한ㆍ중ㆍ일간 IT분야 공동전선이 실질적으로 가능할지부터가 우선 의문이다. 얼마든지 차별적 대응을 구사할 수 있는 다국적기업의 전략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3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정부가 나선다고 해도 이미 한ㆍ중ㆍ일을 벗어나 글로벌 차원에서 합종연횡을 하는 기업들에 무슨 실질적 이득이 될지도 냉정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해마다 과학기술정보위 국정감사 때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있다. 퀄컴에 주는 엄청난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기술료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선지 일각에서는 '원천기술을 우리가 보유했더라면' 혹은 '당시 퀄컴을 통째로 사버렸다면' 등 아쉬운 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실 잘되고 보니 하는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아시아 지역을 벗어나 퀄컴이라는 미국 기업과 동맹이 있었기에 CDMA가 이동통신의 세계 양대표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면,또 그렇게 해서 세계시장에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투자 생산 수출 고용효과는 기술료와 비교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완전히 다른 평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배럿이 자신이 한 전망의 근거로 "자체 기술표준을 만들면 단기적으로는 자국 기업이나 시장을 보호할 수 있겠지만,결국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은 오히려 떨어진다"고 지적한 것은 새겨볼만도 하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국내시장이나 동북아시장만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면 말이다. 근본적으로는 표준에 관한 정부의 포지션도 이제 다시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기술과 시장의 변화가 빠른 지금 무엇보다도 정부가 표준을 주도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무선인터넷 플랫폼 표준에서 보듯 IT표준이 통상이슈가 돼 있는 마당에 정부의 개입은 통상마찰만 일으키거나 글로벌 차원에서 기업의 전략 구사에 되레 방해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표준은 세(勢)를 얻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자주(自主)는 자칫 고립이 될 위험이 있다. 또 시장은 기술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산화 고집으로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오직 이익을 가져다 주는 표준만이 의미가 있다면 반MS·반퀄컴 정서 같은 것은 언제든 내던질 수도 있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제는 표준을 시장경쟁에 맡겨볼 만도 하다. 사실 동북아 허브라는 것은 그 어떤 표준에도 길을 내줄 만큼 개방적이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논설ㆍ전문위원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