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일단 결렬됨으로써 국내 농업분야는 전면 개방이라는 '직격탄'을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의 시간만 벌었을뿐 농업개방은 사실상 이번 각료회의에서 합의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농업이 아닌 '싱가포르 이슈'가 결렬 사유였다는 것이고 보면 농업 분야는 대폭적인 관세인하를 골자로 한 대개방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대개방에 직면한 국내 농업의 낙후성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94년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 이후 무려 71조8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퍼붓고도 여전히 국제 협상무대에서 '개도국' 지위를 구걸하다시피 하고 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살릴 것은 적극적으로 살리는 방향으로 농업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나눠먹는 농특세


정부의 쏟아붓기식 농업 지원책은 지난 94년 5월 UR 협상 타결 직후 본격화됐다.


대표적인 것이 농어촌특별세다.


농특세는 UR 협상으로 타격을 입을 농업 분야 지원을 위해 94년부터 10년간 15조원을 걷는다는 목표로 신설된 목적세.


농림부는 작년까지 총 13조6천억원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정작 주무 부처인 농림부가 지난 2001년까지 직접 사용한 농특세 예산은 42.8%에 불과하다.


농업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건교부는 오지ㆍ낙도 교통지원,교육부는 실업고 학과 개편 등 9개 부처가 예산을 나눠 갖다보니 농특세가 농업과 직접 관련 없는 분야에 쓰이는 '눈먼 돈'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림부는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농특세를 10년 더 걷어야겠다는 주장만 펴고 있다.



◆ 경쟁력은 뒷전


지난 94년 이후 농업예산도 꾸준히 증가해 왔다.


95년 농업부문 예산은 전년 대비 34.8%나 증가하기도 했다.


94년부터 작년까지 농업 부문에 투입된 예산은 무려 71조8천억원.


그러나 농업예산이 농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구조개선 사업에 쓰이기보다는 농어가의 부채탕감과 소득을 보전해 주는 낭비성, 사회성 예산으로 전락하고 있다.


때문에 정작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필요한 농업시설 투자와 기업농 육성, 유통개혁 같은 구조개선용 예산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농가 빚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예산(부담 경감 및 소득보전)과 양곡지원 등 비구조조정 예산은 올해도 3조7천억원을 기록, 농림부 전체 예산(9조8천3천억원)의 37.8%를 차지하고 있다.


생산기반 조성과 농업인 육성과 같은 구조조정 예산은 전년 대비 한자릿수의 소폭 증가에 머물거나 줄어들고 있다.



◆ 과감한 구조조정 필요


농업전문가들은 "이제는 육성할 농가와 정리해야 할 농가를 구분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고 있다.


농가부채를 줄여준다고 해서 부실한 농가를 언제까지 안고갈 수도 없고 국민 세금으로 농가부채를 떠안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농가부채는 정부의 각종 경감대책에도 불구하고 계속 늘어나 지난 95년 호당 9백20만원에서 지난 2001년에는 2천20만원으로 두배나 증가했다.


막대한 돈을 농어촌 구조개선 사업에 투입했지만 나눠먹기식 예산 배분으로 농업경쟁력 제고는 사실상 실패하고 만 셈이다.


전문가들은 농업인구를 줄이되 농업규모는 확대하며 한계 농업은 정리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정치성 배제가 관건


농정에서 정치성을 배제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정치를 농업의 볼모로 만든 상태에서 경제성을 기준으로 하는 과감한 구조개혁은 불가능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농민운동가가 농림부 장관이 되는 현상부터 혁파하지 않고서는 농업개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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