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이 지난 2000년 4월 현대측으로부터 100억원 이상을 받은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는 것과 관련,당시 현대그룹의 재정 형편이 어떠했는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시의 현대그룹 상황을 들여다보면 권 전 고문에게 거액의 비자금을 건넨 배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일 재계와 금융계 등에 따르면 현대그룹은 당시 현대건설 등 계열사들의 자금난이 심각했고, 설상가상 `왕자의 난'으로 그룹 전체의 신인도가 땅에 떨어져, 자력으로 활로를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은 외환위기 이후 건설경기 침체로 경영여건이 나빠진데다 국내외 건설사업의 부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돈줄까지 막혀 만기도래하는 채권을막기가 힘든 처지였다. 또 현대그룹이 지난 97년 금융사업 확장을 위해 인수한 현대투신도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정부의 강권으로 98년 부실기업 한남투신을 인수한 것이 자금난을 더욱 가중시켜 거의 동반 침몰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이런 와중에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왕자의 난'이 벌어져, 현대그룹은 시장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고 뒤이은 채권단의 무차별적인 자금회수로 금융지원이 절실한 상태였다. 많은 금융계 관계자들은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금융시장에서는 도저히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 권 전 고문에게 비자금을 건네주고 정부의 힘을 빌려 궁지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검찰 수사 결과가 공식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2000년 5월부터 현대그룹의자금 흐름이 갑자기 좋아지 것은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현대그룹의 주채권 은행인 외환은행은 2000년 5월 다른 채권은행들과 함께 4천억원을 현대에 긴급지원했고 이어 산업은행과 토지공사 등도 번갈아 자금지원에 나서는 등 현대의 유동성 위기 해소를 위한 지원이 잇따랐다. 이처럼 국책 기관과 금융권이 지난 2000년 5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현대그룹에지원한 자금은 모두 33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의 힘이 개입하지 않고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현대그룹이 총선을 앞두고 자금이 필요했던 권 전 고문에게 거액의 비자금을 제공한 뒤 그의 힘을 빌려 정부 지원을 이끌어냈을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현영복기자 youngbo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