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운영 주체들의 무책임과 집단 이기주의에 휘말려 시급한 핵심 국정 현안들이 표류하고 있다.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은 국회 비준 지연으로 국제 망신거리가 될 판이다. 17년째 풀지 못한 최장기 국정과제인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부지(부안군 위도) 결정도 새만금과 더불어 홍역을 치르고 있다. 외자유치를 확대하기 위한 경제자유구역 지정과 한ㆍ미투자협정(BIT)도 관련 이해집단의 반발 등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집단 반발이 예상되는 사안이면 무조건 발을 빼려는 분위기다. 정부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안에 대해 조정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다. 정부가 내세운 '토론공화국'과 '대화와 타협'이란 대원칙이 정작 현실에선 '버티면 들어준다'는 식으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 국회는 국정현안의 '블랙홀' 여ㆍ야간 정치싸움에는 적극적인 국회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국정 현안들 앞에선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이다. 쟁점 법안이 국회로 가면 함흥차사여서 국회가 국정의 '블랙홀'이란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ㆍ칠레 FTA다. FTA를 통한 세계무역의 지역주의 추세가 전세계로 확산되며 이미 1백84건의 FTA가 체결됐고 70건이 진행중인데 한국만 '왕따'가 될 판이다. 이 문제의 중심에 농민 표밭을 의식한 국회가 있다. 여ㆍ야 구분없이 한ㆍ칠레 FTA 비준에 부정적이다. 농민들을 설득할 수 있게끔 획기적인 정부 대책을 내놓으라는 주문이다. 칠레에선 오는 8월말께 비준안을 통과시킬 전망이지만 국내에선 비준 논의를 9월 정기국회로 미뤘다. 또 여당인 민주당 정대철 대표가 23일 한ㆍ칠레 FTA 이행특별법 제정안에 대한 대표 발의계획을 철회하자 부랴부랴 같은 당 임채정 의원이 총대를 메고 대신 대표 발의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경제자유구역 지정의 필수 요건인 관련 세법 개정안도 재정경제부가 국회에 제출한 지 2개월여가 지난 23일에야 국회 재경위를 통과했다. 하지만 정부가 원래 계획대로 인천 부산 광양 세 곳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하기까진 노동ㆍ환경단체 교육계의 반대와 일부 지자체의 지정 확대 요구 사이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 새만금ㆍ위도 패키지 혼선 공교롭게 같은 전북에 위치한 새만금 간척사업과 위도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 선정은 지자체 지역주민 사회단체 등의 찬반 논란 속에 복잡하게 꼬여 있다. 지난 15일 서울행정법원의 공사 중단 결정으로 '브레이크'가 걸린 새만금 사업은 농림부 장관 사퇴, 농림부 항고 결정 등 사법부와 행정부간의 힘겨루기로까지 비화됐다. '환경논리'와 '경제논리'가 맞서는 양상이다. 새만금 사업은 참여정부가 출범 직후 "사업은 추진하되 용도 등은 종합적으로 재검토한다"는 모호한 방침을 내놓으면서 논란을 부추긴 측면도 있다. 또 23일 부지선정위원회를 열어 위도를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로 확정하려던 산업자원부의 계획도 일단 24일로 미뤄졌다. 일부 환경ㆍ종교단체와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예상 수위를 넘어서 쉽사리 매듭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 조정능력 없는 정부 정부내 조정능력도 의구심을 낳고 있다. 토론식 국정운영의 결과 각 부처가 소관 업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조정다운 조정사례를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다. '책임 총리'를 구현한다던 현 정부 초기 구상도 이같은 현실 속에 흐지부지돼 가고 있다. 6년째 끌어온 한ㆍ미투자협정은 문화관광부와 영화업계의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의무상영일수) 축소 반대에 밀려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북핵문제 등으로 외국인들이 투자를 꺼리는 상황에서 한ㆍ미투자협정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지만 논의 자체가 다시 잠복해 버렸다. 의욕적으로 스크린쿼터 문제를 공론화하려던 재정경제부도 맥이 빠진 모습이다. 이처럼 국회도 정부도 현안을 풀어갈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집단이기주의에 번번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의 확고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나라 바로 세우기'가 최우선의 화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오형규ㆍ이정호 기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