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으며 통일 후에는 가장 번화한 곳으로 탈바꿈한 베를린의 포츠담광장. 관광명소와 쇼핑가로 유명한 이 광장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백화점 포츠다머플라츠 아르카덴 입구에는 이색적인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8시까지 모든 점포들이 문을 엽니다.' 토요일에는 오후 4시까지만 문을 열도록 한 규제가 지난 6월부터 오후 8시로 연장됐음을 알리는 광고였다. 독일 전역의 쇼핑거리에는 이같은 광고판들이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다. 독일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촘촘하게 짜여진 그물망같은 법규를 운영하는 나라다. '독일인들은 질서가 없거나 조직화되지 않은 사회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열과 규칙, 규정과 규제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다비드 마르시, '독일인'의 저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법규를 중시한다. 가능한 한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세세하게 법규와 규제를 만들다 보니 예외 또는 자의적인 운영이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매장 운영시간도 이처럼 깐깐한 규제 대상이다. 역 앞이나 관광지 등 특수지역을 제외하고는 평일 오후 8시까지만 운영할 수 있다. 일요일에는 아예 장사를 할 수 없다. 다만 빵가게는 일요일 오전8시부터 11시까지 문을 열 수 있다. 할인 판매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폐점이나 희년(禧年, jublee)세일을 제외하고는 연간 2주 정도의 계절세일만 허용된다. 판매가격의 3%를 넘는 판촉물이나 적립금을 주지 못하도록 한 규제는 2001년 폐지됐으나 손해를 보면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여전히 금지돼 있다. 미장원이나 인테리어가게 전기수리점 주인들은 장인(Meister) 자격증 소지자들이다. 독일은 전통적인 수공업자 전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생명을 다루거나 위험이 있는 분야뿐만 아니라 이발소 집수리점 등 거의 모든 분야(94개 업종)에서 장인 자격증이 있어야 가게를 낼 수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사회개혁 프로그램인 '아젠다 2010'에서 위험이나 전문지식이 덜 중요한 62개 업종의 장인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밝힐 만큼 장인 제도는 독일 자영업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기업 관련 규제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미카엘 그뢰믈링 쾰른경제연구원 거시경제담당위원은 "노동및 환경 분야를 비롯해 업종별로 지켜야 할 규제가 매우 많다"며 "독일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노동 규제는 대부분 고용안정과 관련돼 있다. 해고 요건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대상자에게 반드시 사전통보를 해야 한다. 근무기간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위로금도 지급해야 한다. 김원태 LG전자 독일법인장은 "몇 개월 전에 해고의사를 통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가 소송을 제기하면 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 급여를 계속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독일에서 제기된 노동 관련 소송은 모두 56만9천여건이었다. 이중 54만2천여건은 노동자들이 제소한 것이었고 절반에 가까운 24만6여건이 해고 관련 소송이었다. 이 중 절반 이상은 사용주가 주는 보상금으로 합의됐다. 건설업에서는 총 임금의 20%를 별도의 펀드로 적립해야 한다는 규제도 있다. 유급휴일이나 악천후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는 근로자들에게 돈을 지급하기 위한 제도다. 독일은 경제성을 따지지 않는 환경규제로도 유명하다. 독일에서 채택한 플라스틱 재활용 방식은 매장이나 소각보다 비용이 아홉배나 비싸다. 가정에서 쓰이는 복합플라스틱 재활용은 기존 방식에 비해 비쌀 뿐만 아니라 환경개선 효과마저 의심받고 있다. 올해 도입한 음료캔ㆍ유리병 반환처리 의무 부과는 물류비용만 증가시켰을 뿐 환경개선효과는 거의 없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페트병 등을 사용하면 한번만 운송하면 되지만 유리병이나 캔을 사용하는 경우 이를 재활용하기 위해 별도의 수집차량을 운행해야 하므로 기름 낭비가 더 심해졌고 비용도 6.5배 비싸졌다"고 지적했다. 기업 인수ㆍ합병(M&A)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무척 까다롭다. 인수하려는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고 인수대상 회사의 본사 위치, 경영진의 재무적 책임 한계, 고용조건 변화 등을 명시한 문건을 제출해야 한다. 인수대상 회사 임원들로부터 별도의 추천서와 평가서도 받아야 한다. 이같은 문서들은 주주뿐만 아니라 인수대상 회사의 근로자(직장평의회)에게도 전달해야 한다. 법규에 없는 규제도 많다. 공무원을 만나기가 쉽지 않고, 인ㆍ허가 사항이 아닌데도 까다로운 절차를 강요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KOTRA 프랑크푸르트무역관 관계자는 "체류비자 발급이나 연락사무소 설치 절차 등과 관련해 불만을 털어놓는 한국 기업인이 많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독일은 규제에 지쳐 있는 국가였다. 특별취재반=김호영ㆍ현승윤ㆍ안재석ㆍ김병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