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어느 곳에 가든지 슈파르카세(Sparkasseㆍ지역저축은행)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조그만 은행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은행 규모나 영업 분위기가 한국의 상호저축은행과 비슷하다. 그러나 독일의 슈파르카세는 정부가 주인인 일종의 관영(官營)은행이다. 각 주(州)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분의 5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란데스방크(LB)라 불리는 12개 연방저축은행들도 주 정부가 대주주다. 이처럼 독일 금융제도의 근간에는 정부가 자리잡고 있다. 베를린 슈파르카세협회(DSGV)에 따르면 이들 '관영' 지역저축은행은 독일내 5백62곳에서 영업중이며 작년말 현재 소매 및 중소기업 금융시장에서 각각 40.7%와 42%의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도이체방크, 히포페라인스방크(HVB), 드레스너방크, 코메르츠방크 등 4대 민영은행의 소매금융시장 점유율은 16%에 불과하다. 금융산업 자체가 관치를 넘어 아예 관영화되어 있는 것이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관영은행의 한계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베스트LB는 영국에서 TV렌트사업을 하는 박스클레버사에 돈을 빌려줬다가 부실화돼 골치를 앓고 있다. 바바리아 주정부가 대주주인 바이에른LB도 미디어그룹인 키르히(Kirch)와 건축회사 필립홀츠만, 항공기제작업체 페어차일드 도르니어 등 부도난 회사에 거액이 물려 있다. 미국의 엔론에도 돈을 빌려줘 손해를 봤다. 국제금융과 기업금융에서 경험이 부족한 정부출자 저축은행들이 외형경쟁을 하다보니 이처럼 부실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관영 은행'의 문제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저리 대출을 일삼으면서 금융업 전반의 수익성을 동반 악화시키고 있다는게 더욱 큰 문제로 지적된다. 낮은 금리 경쟁력을 바탕으로 금융시장을 저인망식으로 훑고 있는 저축은행들로 인해 독일내 평균 예대마진은 단 1%선에 불과하다. 미국과 영국(평균 4%)의 4분의 1 수준이다. 도이체방크는 지난해말 총자산이 7천5백83억유로(약 1천조원)로 독일 최대의 민간은행이다. 호경기였던 2000년에는 1백35억유로(약 18조원)의 순이익을 냈고 경기가 나빴던 작년에도 4억유로(5천4백억원)의 세후 순이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은행마저 소매금융 시장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대주주인 저축은행들에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에 본점을 둔 다국적 금융회사 도이체방크의 로날트 바이체르트 기업·자산운용담당 홍보부장은 "정부의 지급보증을 공짜로 받아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 지역저축은행들과의 경쟁에서 민영은행들이 이기기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스탠더드&푸어스(S&P)가 평가한 도이체방크의 신용등급이 AA-인데 비해 무명의 저축은행들이 정부 신용등급과 동일한 AAA등급을 받고 있는 데서도 독일 금융산업의 '관영 구조'는 잘 드러난다. 메릴린치증권에서 유럽은행들을 담당하는 슈투아르트 그라함 애널리스트는 "독일의 민영은행들은 주주가 아닌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슈파르카세와 LB들에 둘러싸여 있다"며 "독일 은행들은 주주들에게는 무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독일 민간은행들은 관영 금융회사들과의 힘겨운 싸움과 3년째 침체된 경기로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독일의 4대은행은 도이체방크를 제외하고는 모두 적자(세전순이익 기준)를 냈다. 2000년에 26만2천명이었던 직원 숫자도 지난해 21만8천명으로 줄었다. 4대 은행들은 내년까지 3만8천명을 추가 감원할 계획이다. 공공 금융회사들이 민간은행 직원들을 쫓아내고 있는 셈이다. 홀거 베른트 베를린 슈파르카세협회 이사는 "독일 저축은행들은 그동안 지역 금융을 활성화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며 독일의 금융제도를 옹호했다. 그러나 저축은행의 부실이 심각해지고 민간 금융시장의 발전마저 가로막는 부작용이 커지자 저축은행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저축은행을 민영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독일 정부는 2005년까지 저축은행에 해주던 공짜 지급보증을 폐지하기로 EU(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2년전에 합의했다. EU내 국경이 사라진 마당에 독일 정부가 저축은행에 사실상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불공정 행위라는 EU측의 압박 때문이었다. 올해부터 약간이나마 보증료를 받는 지방자치단체들도 나타나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는 그러나 공공은행들을 민영화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궤도 수정키로 한 '아젠다 2010' 개혁 프로그램에도 금융회사 민영화방안은 포함돼 있지 않다. 그러나 베스트LB와 바이에른LB 등은 최근 회사를 분할하는 등 민영화에 대비하고 있다. 공공 금융회사들이 정부의 울타리에 더이상 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독일 정부가 그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특별취재반=김호영ㆍ현승윤ㆍ안재석ㆍ김병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