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에스터 원사업체들이 저가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여파로 최악의 상황을 견디다 못한 일부 업체가 현금 확보를 위해 투매에 나서면서 화섬업계 전체가 사활을 건 제살깎기 경쟁에 들어갔다. 일부에선 덤핑 공세까지 이뤄지고 있다. 폴리에스터 원사 가격은 연초 파운드당 53∼65센트(75데니어 범용제품 기준)였으나 최근 45∼48센트로 10∼30%나 폭락했다. 업체들은 이미 20% 이상 조업률을 떨어뜨렸는데도 사정이 악화되자 추가 조업단축도 계획하고 있다. 가격 하락이 당분간 지속될 조짐이어서다. 일부에선 생산 설비를 아예 철거하는 회사까지 나오고 있다. 효성은 연초 1백%에 육박했던 폴리에스터 설비가동률을 지금은 80% 수준으로 낮췄다. 90%를 웃돌던 코오롱의 가동률도 70∼80%대로 떨어졌다. 휴비스와 새한도 마찬가지다. 폴리에스터 원사 가격이 급락한 것은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지속된 중소 원사업체들의 저가 공세가 최근 화섬경기 악화와 맞물리면서 대형 업체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 효성 관계자는 "몇년 전부터 워크아웃이나 화의업체들이 금융비용 부담이 거의 없다는 점을 악용해 덤핑으로 시장을 교란시켜 왔다"며 "최근 몇몇 대형업체들이 이같은 덤핑 대열에 가담하면서 업계를 출혈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했다. 코오롱 관계자도 "한 대형업체가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는 루머가 돌면서 원사 가격이 곤두박질 치고 있다"며 "이 업체가 현금 확보를 위해 투매를 시작하면서 화섬업계 전반으로 여파가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덤핑 의혹을 받고 있는 업체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정리돼야 할 기업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바람에 그 불똥이 우리에게 튄 것"이라며 "우리도 엄연한 피해자"라고 반박했다. 결국 폴리에스터 업계를 강타한 덤핑 문제는 화섬업계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얘기다. 화섬 시장은 1990년대 중반 세계적인 수요 증가에 따라 신규업체의 시장 진입과 기존 업체의 설비 증설이 봇물을 이뤘다. 그 결과 9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공급과잉 현상이 초래됐고 경영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13개 기업 가운데 대하합섬은 문을 닫았고 나머지 4개 부실기업들은 워크아웃과 화의에 들어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시장원리에 따라 부실 기업들을 매각하든지 퇴출시켜야 했지만 정치적인 판단으로 이들을 그대로 살려놓았다는 게 문제"라며 "이 기업들이 덤핑으로 유통 질서를 문란케 해 정상 기업들에까지 피해가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증권 임정훈 애널리스트는 "수요는 적은데 공급은 넘치는 상황에서 업체들의 가격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모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형국이 됐다"며 "화섬 시장이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시장 논리에 근거한 업계 재편뿐"이라고 강조했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