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새 정부 첫 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에서 사정의 속도조절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세 가지 요인을 감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첫째, 경제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향후 경제전망이 불투명한데다 최태원 SK 회장의 구속에 이어 손길승 SK 회장(전경련 회장) 소환설, 한화그룹 수사 재개설 등으로 자칫 기업의 투자활동이 과도하게 위축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재인 민정수석은 '노 대통령의 언급이 현재의 경제상황을 고려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재벌그룹 수사가 잘못을 바로 잡는데 그치지 않고 경제에 주름살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동북아 경제중심국가를 구축하자고 제창했는데 재계에서 투자에 적극 나서지 않고 외국인마저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이 과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된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이 관계자는 "새 정부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분위기가 국내외에서 모두 걷히지 않았다"며 "기업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검찰의 연이은 수사활동을 보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 '투자하고 싶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책이 확고한지 의구심이 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문 수석은 최근의 재벌 수사와 관련, "전적으로 검찰의 판단이며 검찰과 (청와대의)협의통로는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사회안정 분위기 조성 최근 사회 분위기도 고려된 듯하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온 사회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재계나 정치권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면 상당수 국민들이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더군다나 대외적으로는 북한핵 문제가 여전히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제일 먼저 대구 지하철 참사를 거론했다. 그는 비서관들에게 "대통령과 정부의 기본 의무는 국민들이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25일 취임식부터 26일 개별접견까지 취임사절로 온 각국의 전·현직 지도자들과 나눈 대화도 대부분 북한핵 문제의 원만한 해결에 집중됐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 사정'이니 '표적 수사'니 하는 불필요한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자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국내 정치상황과 연계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고건 총리 인준안 처리를 비롯 원만한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것. 또 1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의식, 다양한 목소리를 끌어안는 '화합정치'를 선보일 필요도 있다는 판단이 작용하기도 했다. ◆ 원칙에 따른 지속 사정 노 대통령의 그동안 발언을 보면 '속도는 줄이되 원칙대로 5년 내내 지속적인 사정활동을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송경희 대변인도 "처음에 몰아 하다 흐지부지되는 것을 경계하자는 의미"라며 "노 대통령이 그동안 밝힌 원칙론을 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재벌개혁이) 어떤 정치적 의도나 기획에 의해 이뤄진다면 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고 성공할 수도 없다. 나는 기획해서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의 개혁을 할 생각이 없다"고 밝혀왔다. 직접적인 동기가 어떠했던 이번 발언으로 검찰의 수사칼날은 상당히 무뎌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한편 이번 발언으로 검찰의 수사권 독립에 차질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검찰이 참여연대 등의 고발을 받아들여 나름대로 수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속도조절을 요구한 것이라면 검찰업무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간섭이 될 수 있다. 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