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2월 독일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철강회사 '만네스만'이 영국 보다폰에 의해 적대적 M&A(인수합병)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백25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회사가 기관투자가들의 머니게임에 휘말려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손을 들어야 했다. 독일에선 처음으로 발생한 외국자본에 의한 적대적 매수 사건이었던데다 M&A 규모도 1천8백30억달러(약 2백20조원)에 달하는 초특급이어서 '독일주식회사의 종말'이라고 불릴 지경이었다. 이 사건은 전통적인 독일식 자본주의를 버리고 미국식을 추종한 기업의 비운이란 평을 낳았다. 자금대출은 물론 주식을 상호보유하거나 임원을 파견하는 형식으로 안정적 경영권을 유지했던 관계에서 벗어나 주식시장을 활용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달콤함'에 빠졌던 결과이기도 하다. 지난 99년 10월 영국 이동통신회사인 오렌지 매수계획까지 발표했던 만네스만이 4개월만에 거꾸로 보다폰에 매수당한 사건은 독일 기업들에 미국식 경영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다시금 독일식 경영으로 'U턴'하려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다임러크라이슬러가 2001년 초 도이체방크에 적대적 매수에 대한 기업방어에 협력해달라고 요청했는가 하면 그해 7월엔 적대적 매수로부터 독일기업을 지키려는 목적의 '독일매수법'도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식 자본주의의 틀을 강화해 왔다. 기업 자금조달의 큰 물꼬를 금융회사에서 주식시장으로 돌렸다. 부채비율 2백% 규제가 단적인 예다. 사외이사제를 도입하고 주주대표소송 요건을 완화하는 등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 개선의 초점도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맞춰졌다. 그 결과 미래를 위한 투자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은행에서 거액을 빌려쓰면 악(惡)이고, 주식시장에서 조달하면 선(善)'이라는 도식이 생겨났다. 나아가 '월스트리트 스탠더드(월가의 표준)는 선이고 나머지는 악'이라는 인식마저 낳았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 보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은행에서 자금을 빌리는 것보다 월등히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은행에 이자를 줘야 하듯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경우도 투자자들에게 배당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배당은 주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는 기업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곤두박질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저금리 시대에는 이자보다 배당이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경영에 있어 정작 중요한 문제는 자금조달 방식보다는 얼마나 경쟁력 있게 장사를 잘 하느냐 하는데 있다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99년 '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을 만들면서 "지배구조는 각국의 독특한 제도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나라에 적용될 수 있는 단일 모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양세영 기업경영팀장도 "기업지배구조는 '선악'의 문제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개별 기업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룹경영이냐 개별기업 경영이냐,전문경영이냐 오너경영이냐 하는 문제도 기업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 지적이다. 적은 지분을 갖고 거대기업을 지배하는 사례는 선진국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오너가 경영하는 조직은 비효율적이고, 전문화된 독립경영 체제만이 최선이라는 시각도 명분은 좋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오너경영과 전문경영은) 모두 장.단점을 함께 안고 있는 산업조직의 한 형태일 뿐 정부가 나서서 획일적으로 규제할 사안은 아니다"(정갑영 연세대 교수)라는 주장도 그래서 나온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존 데이비스 교수는 향후 전문경영인들의 역할이 커지겠지만 오너경영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것은 '불건전한 편견'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사람들은 한국 기업이 지난 90년대 중반 일본의 메모리반도체 회사들을 제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 있었던 오너경영체제를 꼽는다. 일본 업체들의 경우는 경기가 침체국면으로 접어들자 전문경영인들이 대규모 투자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은 미국식이나 독일식을 떠나 세계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한국적 경영시스템'을 정립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뜻이다. 손희식 기자 hssoh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