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가장 혹독한 고초를 겪은 곳은 '빚 많은 대기업들'이었다.

대우 쌍용 한라 고합 뉴코아 해태...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외환위기와 금융회사들의 무차별적인 자금회수, 감당하기 힘든 고금리에 공룡 기업들이 힘없이 무너졌다.

지난 98년 자산순위 30위 안에 들어 있던 대기업그룹중 절반이 넘는 16개 그룹이 해체됐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도 함께 사라졌다.

김대중 정부는 과도한 차입경영과 외형위주 성장에 익숙해 있던 기업들의 경영관행을 뜯어고치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부채비율 2백%'라는 칼을 들이대며 빚을 줄이도록 전방위로 압박했다.

계열회사간 상호 지급보증도 금지시켰다.

대주주의 전횡을 막기 위해 소수주주권을 대폭 강화했고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했다.

반민반관(半民半官)의 기업구조조정위원회를 만들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추진했다.

이같은 기업구조조정은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만들고 시장을 단기간에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워크아웃을 지나치게 남용해 시장의 경쟁원리를 퇴색시켰고, 부실 기업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금융감독위원회와 기업구조조정위원회가 주도한 '타율 구조조정'은 새로운 관치(官治)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재무구조 개선에는 기여

김대중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주채권은행을 통한 기업 재무구조 개선에 나섰다.

부채 규모 2천5백억원 이상인 64대 그룹에 대해 은행과 기업이 재무구조개선협약을 맺게 했고 정해진 시한 내에 부채비율을 낮추도록 했다.

기업들은 빚을 줄이기 위해 우량자산을 헐값에 매각했고 설비투자를 줄였다.

그 결과 재무구조는 눈에 띄게 개선됐다.

97년 말 3백96%였던 기업의 부채비율은 올 6월 말 1백35%로 낮아졌다.

차입금 의존도 역시 같은 기간중 54.2%에서 33.1%로 떨어졌다.

지급이자는 줄어드는 반면 영업이익이 늘어나면서 이자보상비율도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 기업경쟁력 강화에 역행

그러나 '밀어붙이기' 일변도의 재무구조 개선작업은 기업의 본질적인 경쟁력 강화와는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곳곳에서 '무리한 살빼기'의 후유증이 나타났다.

김용렬 산업연구원 기업정책실장은 "부채비율 축소 등은 위기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긴 했지만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투자를 위축시키고 신규사업 진출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선단식 경영' 차단이란 명분 아래 도입된 출자총액제한제도는 기업의 자율경영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세계에서 오로지 한국만 시행 중인 이 제도는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2월 폐지됐다가 2년 만인 2000년 4월 부활됐다.

상장회사는 사외이사를 25% 이상 선임하도록 의무화한 규정도 독단적인 경영을 견제한다는 본래 취지와 달리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기업 내용을 제대로 모르는 사외이사들이 위험이 수반되는 투자에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사외이사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 기업에 대한 신뢰회복이 긴요

이주선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장은 "정부가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기업공시제도를 강화하는 등 여러가지 새로운 제도를 시행했으나 현실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며 "법으로 명시한 각종 규제를 권고사항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외이사제 도입이나 출자총액 제한제도 등을 정부가 법으로 기업에 강제한 것은 잘못됐다는 얘기다.

어쨌든 김대중 정부는 '기업개혁'을 이유로 여러가지 기업규제를 양산했다.

애초부터 기업주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회계기준 강화, 외부감사인 선임위원회 설치, 지급보증 금지, 출자총액 제한 등은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시행됐다.

정부는 기업의 부채를 줄이는 작업에까지 직접 개입할 만큼 기업인들을 믿지 못했다.

'미완의 기업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업에 대한 정부의 인식부터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는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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