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의 흐름은 중동위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왔다. 중동의 불씨가 되살아날 때마다 유가가 급등,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악재가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질긴 인연은 원유가 중동 산유국들의 '무기'가 되기 시작한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일 무기화=석유 가격 통제권은 원래 거대 석유 메이저들이 움켜쥐고 있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원유 가격은 배럴당 1.29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대통령이 지난 1969년 9월 쿠데타로 집권한 뒤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석유시설의 국유화를 선언하며 가격 인상을 추진,이듬해인 1970년에는 유가가 배럴당 2.53달러까지 치솟았다. 카다피가 가격 인상으로 국가 수입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중동 산유국에도 일깨워주면서 '석유무기화' 시대를 연 것이다. ◆1차 오일쇼크=이집트의 M A 사다트 대통령이 1973년 10월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하며 시작된 4차 중동전으로 사상 유례없는 유가랠리가 시작됐다. 중동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한 미국과 네덜란드 등에 대해 석유 금수조치를 취했다. 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당시 배럴당 2.50달러던 유가를 즉각 5.12달러로 인상했고 이어 그해 12월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11.65달러로 끌어올렸다. 3개월 만에 유가가 4배 이상 뛰는 석유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2차 오일쇼크=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혁명은 이란의 석유 수출 중단사태로 이어졌다. 공급 부족으로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12.7달러에서 34달러대까지 3배 이상 뛰었고,80년 이란·이라크 전쟁까지 발발하면서 그해 11월에는 배럴당 40달러를 웃돌기도 했다. 이라크가 이란 유전을 노리고 개전한 이 전쟁으로 당시 OPEC 산유량의 10%를 차지하는 이란 유전이 막히고 이라크까지 전쟁에 휩쓸리면서 국제유가는 30달러대의 고공행진을 83년 2월까지 이어갔다. ◆걸프전=90년 8월 단행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도 유가를 단숨에 2배 이상 뛰게 했다. 그해 7월 배럴당 13달러 수준이던 두바이유는 침공일인 8월2일 19.45달러로 급등한 뒤 9월께는 37.04달러까지 폭등한 것. 그러나 전쟁 발발 직전인 91년 1월 초 유가는 25.33달러로 떨어졌고 미국이 다국적군을 이끌고 이라크를 공격한 1월17일엔 하루새 9.83달러(38.8%)나 폭락하며 15.50달러로 내려앉았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