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교섭은 지난 92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48차 유엔아태경제사회이사회(ESCAP) 참석차 방중한 이상옥(李相玉)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당시 중국 외교부장간 회담을 계기로 착수됐다. 우리측에서는 당시 권병현(權丙鉉) 외무부 본부대사(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와 외무부내 중국담당 신정승(辛正承) 동북아2과장(현 외교부 아태국장)이 협상팀으로참여했고, 아주국장이었던 김석우(金錫友) 전 통일부차관이 지원했다. 중국은 스리랑카, 에티오피아 대사를 지낸 장루이지예(張瑞杰) 본부대사와 외교부 조선처장이었던 리 빈(李 濱) 현 주한중국대사가 실무교섭팀을 맡았고 아주국 부사장(부국장)이었던 장팅옌(張庭延) 초대 주한중국대사가 교섭을 지원했다 양측은 4월 장관회담 후 각각 실무협상팀을 구성, 5월 중순 1차, 5월말-6월초 2차, 6월말-7월초 3차교섭을 벌였다. 하루에 10-12시간씩, 한번에 2박3일 또는 3박4일간 진행된 교섭을 통해 3차 교섭에서 사실상 수교에 합의하게 됐다. 수교협상 성패의 관건은 비밀유지 문제였다. 수교교섭 사실이 새 나갈 경우 중국내 김일성(金日成) 인맥의 반발 및 대만의 총력을 다한 방해공작으로 수교교섭이 깨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리측 실무협상팀인 권병현 본부대사가 부친 노환을 이유로 사무실을 비웠고,신정승 동북아2과장이 본인 건강을 이유로 돌연 과장직을 사임한 채 외부의 눈길을 피해 동빙고동 안가에 숨어 수교작업을 한 것은 외교부내 유명한 일화. "5월중순 첫 교섭차 중국으로 출장을 가기전 `더운지방으로 가느냐, 추운지방으로 가느냐'는 집사람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더니 부인이 출장가방에 여름 옷과 겨울옷을 같이 넣었더라"고 권 이사장은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우리 협상팀은 당시 2-3개팀으로 나눠 홍콩, 도쿄(東京), 상하이(上海) 등 각각 다른 루트를 통해 중국에 갔을 정도로 `007 작전'을 펼쳤다. 막판 협상의 고비는 한국내 당시 대만 정부의 재산처리 문제였다. 특히 중국은 당시 5억달러 안팎으로 추정되던 금싸라기 땅 서울 명동에 있는 자유중국(대만) 대사관을 온전히 자신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수교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우리측에통보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공식수교 1주일 전에서야 대만측에 한중 수교사실을 사전통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명동대사관 관할 등기소에 우리측 요원을 상주시키다 시피하면서 대만측의 명동대사관 제3자 명의이전 여부를 감시했다. 실제 대만측은 우리측 사전통보 이전에 나름대로 낌새를 채고 대사관 부지 처분을 위해 여러 시도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한중 수교합의 사실은 우리측으로부터 사전통보를 받은 대만측에 의해 8월19일 처음 외신을 통해 보도됐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막판까지 "수교가 되더라도 10월은 돼야 할 것"이라고 철저한 연막작전을 펼치다가 8월22일 수교합의를 전격 발표한 뒤 이틀뒤인 24일 베이징에서 수교문서에 공식 서명했다. (서울=연합뉴스) 황재훈기자 j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