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건 지켜야죠.칠레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면서까지 무리하게 추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농림부 무역담당 관계자) "농업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의 최대 걸림돌입니다. 우리 공산품의 수출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 국내 농산물시장을 열지 않으면 칠레는 물론 남미 전체와 통상마찰이 심각해집니다."(산업자원부 관계자)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제5차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고위급 회의가 한달도 안 남은 지난달 31일 협상담당자들은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현 정부는 출범직후 자유무역협정을 통상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웠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다되가도록 '공산품수출촉진론과 농업시장보호론의 상충'이라는 고전적인(?) 고민에서 한발짝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98년 '열린 통상국가'라는 근사한 대외통상정책을 내걸고 미국·일본과 투자협정,칠레와 자유무역협정,한·중·일 자유무역지대설치 등을 먼저 제안했다. 이중에서 성사된 것은 하나도 없다. 두 나라가 경제에 관한 한 국경을 없애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면서 그동안 보호울타리에 안주해온 농업과 농민에게 구체적인 대책과 공감대 형성을 위한 작업을 제대로 한 게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국민 설득은 고사하고 정부관련부처 내부적으로도 '콘센서스'를 전혀 마련하지 못했으면서도 대통령은 상대 국가원수에게 FTA나 투자협정을 제안하고 재다짐해왔으니 협상상대국에서 보면 실소를 금치못할 지경이었다. 칠레와의 협상만 해도 네 차례나 회담을 벌였지만 농업에 대한 우리측의 애매한 태도로 답보상태다. 사과 배 포도 등 주요 농산물을 협정에서 제외해 달라는 우리측의 입장과 그렇다면 냉장고 등 가전제품 일부를 제외하겠다는 칠레의 방침은 아직껏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경제적인 이유로 FTA를 끌어들인 것인지 몰라도 국내적으로 농업을 정치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정부 분위기상 진전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정부의 안이한 대처는 이미 남미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의 목을 죄고 있다. 한국보다 6개월 정도 늦게 칠레와 FTA협상을 시작한 유럽연합(EU)은 지난 4월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따라 EU는 당장 내년부터 현재 6%인 공산품 관세율을 면제받게 돼 판매 때 10% 정도의 가격경쟁력을 얻을 전망이다. 여기에 멕시코와 일본간 FTA체결도 2004년내 이뤄질 것으로 전해지며 멕시코 현지 기업들도 함께 아우성을 치고 있다. 지난주 열린 멕시코시티 수출대책협의회에서 현지 주재 한국상사 법인장 및 지사장들은 "우리 정부가 관련학자들의 연구검토 운운해가며 멕시코와 FTA 체결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다가는 큰 시장을 놓칠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급하다보니 김 대통령은 지난 6월 초 이기호 경제복지노동특보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칠레에 파견,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에게 양국간 FTA 체결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희망하는 친서를 전달했다. 대통령이 서두르다보니 문제가 돼온 칠레산 사과 배 등의 한국내 수입자유화를 칠레측이 양보하는 대신 우리도 냉장고 등 5개 한국산 가전제품을 자유무역협정 예외 품목으로 지정하는 데 잠정 합의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한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 자유무역협정을 맺을지도 모른다. 외교부 다자통상과 관계자도 "수백개의 양허안 중 몇가지 품목이 빠진다고 해도 FTA의 전체 경제적 효과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며 이같은 알맹이 빠진 정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시사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왕윤종 연구원은 "정부가 '농민표',경제적 필요성과 개방 정부의 치적 사이에서 정면돌파가 안된다고 판단하고 정치적인 절충안을 내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멕시코 등 다른 나라와 FTA가 그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개별 협상으로만 봤을 때는 실패작"이라고 진단했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