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바를 노골적으로 요구하지 않고도 얻어낼 수 있다면 최고의 협상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우자동차 인수협상에서 제너럴모터스(GM)가 보여준 고도의 협상능력을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대우차 관계자들은 "이번 협상의 전개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들이 GM의 의도대로 진행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GM은 자신들의 요구를 '클린 애셋(Clean Asset:투명 자산)'이라는 용어로 숨겨 놓았다. 그것은 GM이 교묘하게 얽어 놓은 함정이었고 우리측은 이를 알면서도 피해갈 수 없었다. 2000년 10월3일 개천절. 오호근 대우계열 구조조정협의회 의장, 박순화 산업은행 이사, 앨런 페리튼 GM 아태지역본부장 등이 서울 힐튼호텔에 모여 한 장의 양해각서(MOU)에 사인을 했다. 이 각서는 끝까지 외부에 공표되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GM은 대우차의 클린 애셋만 인수한다'는 조항이었다. 어찌보면 이런 종류의 조항은 원매자측의 당연한 요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클린 애셋을 고집하는 GM의 요구에는 많은 노림수가 담겨 있었다. 우리측이 일괄 매각으로 내놓은 자산 중 상당 부분을 배제하겠다는 것이 GM의 속셈이었다. 문제는 GM이 배제한 자산이 대우 입장에서는 반드시 매각해야 할 자산들이라는 점이었다. 부평공장과 이집트공장 등 일부 해외법인들이 대표적인 물건. 더욱이 GM은 기본적으로 대우차의 회계장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군산공장과 창원공장의 경우 진작부터 우량 자산으로 점찍혀 있었지만 GM은 이들 공장의 장부조차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채권단은 결국 우량자산만 떼내 매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산을 우량자산 내지는 투명한 자산으로 바꿔 매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바로 그것이 법정관리 방안이었다. 2000년 11월6일, 대우차가 1차 부도 처리되자 산업은행의 최익종 대우팀장(현 현대팀장)은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대우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GM에 매각하는데 불리한 것 아닌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 팀장은 "유리한 점도 있고 불리한 점도 있다. 세부내용은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불리한 점이라면 채권단의 자금 지원 동결로 가동률이 떨어지고 기업가치도 급속히 하락해 제값 받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리한 대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채권-채무가 동결됨으로써 적어도 국내 사업장에서는 우발채무의 발생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채무가 확정되는 것, 바로 이것이 GM이 원하는 구도였고 이는 우량 자산은 아니지만 자산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GM은 공식적으로 대우차에 대한 법정관리를 요구한 적이 없다. 실무협상에서 우리나라의 법정관리 제도에 대한 다양한 문의를 하면서 '힌트'를 주는 정도였다. 물론 대우차 법정관리는 노사 대립과 채권단 내부의 복잡한 사정이 작용한 것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채권단이 가진 선택지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매각을 위한 기회 비용으로 매월 1천억원의 운영자금을 쏟아부었고 GM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도 등을 돌린 상태였다. 채권단은 당연히 현상 타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GM과의 협상전개를 위해서도 새로운 돌파구가 있어야 했다. 결국 "대우차 법정관리는 여러가지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GM의 노회한 우회전략이 먹혀든 하나의 사건"(협상팀 관계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GM은 노골적으로 법정관리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법정관리 후의 전개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