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타이틀이 여러 개다. 그 중에서 제일 어울리지 않을 듯한(?) 타이틀은 월드사이버게임즈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 반도체와 휴대폰이 주력인 삼성전자의 CEO답지않게 게임에 관심이 많아 이 대회를 만들었다. "오는 2004년 쯤에는 게임시장이 반도체시장 규모를 따라잡을 것"이라는 위험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환갑이 다 된 윤 회장이 게임산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간단하다. 엔터테인먼트산업이 미래의 성장산업이라는 이유다. 이윤우 반도체 총괄 사장은 생명공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바이오관련 서적을 탐독해왔다. 그에게 "바이오사업이 언제쯤 수익을 내기 시작할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바이오인포매틱스(생물정보학)의 시대는 조금 빨리 오겠지만 의약은 좀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답변이 바로 튀어나왔다. 삼성전자 CEO들의 머리는 "5∼10년 뒤에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라는 화두로 꽉 차 있다. 한 회계법인의 고위관계자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뭘 할 것인가 고민하는 점"을 삼성전자 CEO의 경쟁력으로 꼽았다. 한 컨설팅업체의 대표는 "끊임없이 변신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리더들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 삼성전자 성공의 요체"라고 말했다. 윤 부회장은 IMF(국제통화기금)위기 때 외국인 투자자들이 반도체 이외의 사업을 모두 정리하라고 요구하자 "당신들은 1∼2년 앞을 내다보는 투자자지만 나는 5∼10년 앞을 내다봐야 하는 경영자"라며 거부했다. 휴대전화가 반도체에 이어 떼돈을 벌어주는 캐시카우로 등장한 사실이 윤 부회장의 안목을 읽게 한다. 삼성전자 CEO들에겐 일등주의가 뿌리깊이 배어 있다. 이건희 회장이 주창한 일등주의가 최고인재의 CEO선발로 이어지고 이들이 일등주의의 사령탑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기태 정보통신부문 사장은 휴대전화 신제품이 개발되면 내구성을 시험하기 위해 머리위로 던졌다가 철판 위에 떨어뜨린다. 90㎏의 몸무게로 짓밟아 보기도 한다. 1.5m 높이에서 낙하시키는 국제시험기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품질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같은 제품이라도 좀더 고급인,좀더 비싼 제품을 추구한다. 주력인 D램도 범용제품이 아니라 램버스,DDR(더블데이터레이트)등 고속제품에 치중한다. 휴대폰도 중저가의 보급형 시장이 아니라 고가품시장을 타깃으로 삼았다. 미국에서 히트상품으로 선정된 PDA겸용 스마트폰도 이같은 노력의 결과다. 지난해 전세계 IT시장이 불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만이 흑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고부가제품이 선전했기 때문이다. 품질면에서의 우위와 자신감은 다른 분야로도 이어진다. 진대제 디지털미디어부문 사장이 올해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가전전시회(CES 2002)에서 기조연설을 하겠다고 주최측에 자청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감이 바탕이었다. 윤 부회장이 지난달 28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정관변경에 반대한 외국인주주를 '회사를 일시적으로 이용하려는 주주'라고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일등주의는 CEO들의 학습욕구로 표출된다. 외부 전문가집단의 한 사람이 삼성전자의 CEO로부터 자문을 겸한 점심요청을 받고 나갔을 때의 일화. 나가보니 삼성 직원 2명이 더 나와 있었다. CEO와 대화가 시작되자 이들은 조그만 수첩식 노트를 꺼내들고 필기를 시작했다. 대화내용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 2명을 따라붙인 것이다. 그들은 모임이 끝나고 2시간쯤 지나 "맞는지 확인해 달라"며 대화내용을 정리한 e메일을 보내왔다. "다른 삼성전자 간부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집니다.뭔가 새로운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수첩을 꺼내는 소리가 들립니다" 삼성전자가 지난 92년께 당시 삼성전관(현 삼성SDI)에서 하던 LCD사업을 가져오기 시작할 때의 일이다. LCD는 기초기술이 반도체와 같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 반도체사업부의 모 임원이 LCD사업을 맡는데 난색을 표하자 이윤우 사장은 "책을 읽고나면 자신감이 생길 것"이라며 관련서적 한보따리를 넘겨줬다. 그 임원은 책들을 섭렵하고 나니 정말로 자신감이 생기더라는 것. 이처럼 학습과 연구를 통해 사업을 철저히 준비하는 문화가 뿌리깊이 배어 있다. 1년에 한두차례 소니 도시바 등의 경영진과 토론하는 교류회를 개최하는 것도 일류기업으로부터 배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를 찾아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간다. 내부적으로 각종 비용을 쥐어짜면서도 컨설팅 비용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책임경영이 확실하게 정착돼 있는 회사가 바로 삼성전자다. 사업부별로 대표들은 자신의 책임아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지난달말 7천여억원의 LCD설비투자를 결정하기까지 이상완 LCD부문 사장이 전권을 행사했다. 사장단과 관련임坪?참석하는 경영위원회에서 전반적인 자금사정이나 투자우선순위 등을 검토하지만 모든 것은 이 사장의 책임과 판단에 따라 이뤄졌다. 그 과실도 모두 LCD사업부의 몫이다. 이 회장이 사재로 구입해 반도체사업의 출발점이 됐던 부천공장을 지난 98년말 페어차일드사에 매각한 것도 전자 경영진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다. 이 회장의 손때가 구석구석 묻어있는 공장을,더구나 이익을 내면서 잘 돌아가고 있는 공장을 팔겠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자율경영이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당시 인력구조조정도 이 회장보다는 경영진의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No라고 얘기할 수 있는 CEO가 있다는 것이 삼성의 가장 큰 경쟁력"(삼성의 고위관계자)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세계초일류기업의 잣대로 보면 삼성전자의 CEO들에게 미흡한 부분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전문가는 삼성전자가 한국에선 앞서가지만 선진지식을 습득하고 세계적인 CEO들과 교류하는 측면에서는 해외일류기업의 간부진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이봉구 산업담당부국장(팀장),강현철,이익원,조주현,김성택,이심기,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