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22일 과천 정부청사 농림부 회의실. 정부는 이날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마지막 카드(한국측 관세양허안)를 칠레측에 제시하기에 앞서 농민 등 이해 관계자의 의견을 듣기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말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청회였지 사실은 정부가 정한 양허안을 통보하는 자리. "정부는 이날 쌀 쇠고기 사과 배 등 민감한 농축산물을 제외한 대다수 농축산물의 관세화를 받아들이는 내용의 양허안을 들고 나왔어요. 사과 배는 유예한다는 대안이 제시됐지만 전체 양허안은 아예 공개조차 되지 않았어요. 물론 우리들은 당연히 반대했지요"(공청회 참석자) 한국의 양허안은 몇차례의 정책협의회와 이날의 공청회를 통해 이렇게 공식화됐다. 그해 3월 초로 예정된 한.칠레 FTA 제5차 협상을 앞두고 내부 진통을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서둘러 결론이 내려진 것.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한국의 양허안은 칠레 정부로부터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칠레 정부가 상당수 농축산물이 즉각적인 시장개방(관세화)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이유를 들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나섰기 때문.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 농산물 시장 개방을 못하겠다면 칠레도 공산품 시장을 개방하기 어렵다"며 사실상 협상 결렬을 통보해 왔다. 그러나 정작 우스꽝스러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진다. 칠레의 협상 거부에 대해 정부 일각에서 '차라리 국제적인 망신을 면하게 해준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시각이 대두된 것. "양국 정부가 FTA 협정문에 서명하면 이 협정문은 국회 비준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국내법으로 발효됩니다. 그런데 당시 정황으로 보면 국회 비준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습니다"(협상단 관계자) 정부가 힘으로 밀어붙여 FTA 협상을 타결시켰더라도 국회 비준에 실패하면서 국제적인 망신을 톡톡히 당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야당은 그해 2월26일 정책위의장 성명을 통해 "한.칠레 FTA는 한국 과수 및 축산농을 말살하는 정책"이라며 "농업을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협상 이후로 미룰 것"을 촉구했다. 일부 민주당 의원도 2000년 11월 농림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한국과 칠레의 FTA 체결에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칠레 FTA는 대외명분 다르고 내부사정 다른 이같은 뒤죽박죽 속에서 결국 시일만 끌어 왔던 것이다. 민간 연구소의 한 인사는 "대외적인 협상을 추진하면서 공론화 작업이 부족했다"며 "협상이 다소 길어지더라도 체계적으로 문제점을 짚어보고 대책을 마련, 여론의 공감대를 얻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2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1년 만에 다시 한.칠레 FTA 고위급 협상이 열렸지만 역시 별다른 진전 없이 막을 내렸다. 물론 이날도 정부는 "칠레측이 우리의 수정 양허안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며 협상이 조만간 진전될 것 같은, 이상한 발표를 내놨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