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서울 은평구의 한 볼링장.특유의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핀이 쓰러지고 여기저기서 기성(奇聲)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상당수의 볼러들이 넥타이를 매고 있는데다 여러 레인에 걸쳐 게임이 진행되는 것을 보니 인근 회사에서 온 단체 손님인듯 싶다. 아닌게 아니라 이날 모임은 역촌동과 응암동 등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이웃하는 지점끼리 융화를 위해 공동으로 마련한 단합대회.두 은행 지점에서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은 지난 11월 합병 이후 "이제는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을 확고히 하는 작업이 다른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도 꾸준히 합병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SK텔레콤의 한 관계자는 "최근 한차례 합병이 연기되긴 했지만 회사에서는 멀지 않아 공식적인 합병절차가 완료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새해가 도약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이 각각 한지붕 아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새 살림을 시작하는 첫해를 맞았다. 하나의 울타리 안에 두가족이 살면 불협화음이 따르게 마련.이들이 긴 시간동안 같은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경쟁해 왔던 관계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같은 점에서 한배를 타기로 약속한 두 은행과 두 이동통신 회사의 화합 노력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지도 모른다. ◇오해는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볼링대회를 열었던 조후영 주택은행 서부지점장은 "합병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3개 지점 가운데 한곳은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 직원들이 무척 불안해 했다"며 "이대로 두다간 지점간에 괜한 반목만 쌓이겠다는 생각에 만남의 장을 마련하자고 제의했다"고 말했다. 홍태승 국민은행 역촌동 지점장 역시 "서로간의 무지가 오해를 싹틔우는 것 아니겠느냐"며 "이젠 근거없이 으르렁대는 일이 없도록 자주 모임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이같은 활동을 살리기 위해 현재 영업지역이 겹치는 지점들을 '페어링(pairing) 점포'라는 이름으로 묶은 뒤 지점간의 정보공유와 노하우 전수,친목도모 등을 유도하고 있다. ◇합병을 도약의 발판으로=합병이라는 거대한 충격이 몰고 온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사내에 건전한 경쟁문화가 정착되고 있다는 것.새로운 경쟁자가 생기는 만큼 좀 더 노력하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들 것이라는 공감대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신세기통신의 강창걸 전략기획실 대리는 "2년전부터 합병 얘기가 구체화되면서 직원들 사이에 경쟁력을 갖추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전했다. 서성실 SK텔레콤 광고팀 과장도 "합병이 사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며 "양사의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우려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주택은행의 한 지점장은 "국민은행의 강점으로 꼽히는 '끈질긴 영업력'과 주택은행이 내세우는 '선진시스템'을 서로가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최근의 지점 분위기를 설명했다. ◇갈등의 벽을 넘어=홍태승 지점장은 "그동안 지척에서 줄곧 치열하게 경쟁하던 사이라서 처음에는 직원들이 서로를 무척 어려워했고 양사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오랫동안 주택은행은 국민은행을 향해 "소매금융 빼고 아는게 뭐 있느냐"고 폄하했고 국민은행은 "별 경쟁없이 거저 먹는 장사를 해온 것 아니냐"며 주택은행을 깎아내렸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에 합병해 잘 된 회사가 있느냐는 부정적인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하지만 사소한 불신의 벽을 넘어 두 회사의 장점을 잘 융화시킨다면 한단계 높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합병이 새로운 발전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자신하는 한 지점장의 말 속에서 싱싱한 도약의 기운이 느껴진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