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정보기술) 불황으로 쑥대밭이 된 마쓰시타 등 일본 초일류 기업들이 앞다퉈 감원 살생부 작성에 돌입한 지난 10월초. 후지쓰의 아키쿠사 나오유키 사장(68)이 던진 폭탄 선언 한마디로 일본 재계는 한동안 들끓었다. "기업 경영과 고용 책임은 양립하지 않는다. 고용은 자선이 아니다" 아키쿠사 사장의 발언은 빗발치는 비난의 표적이 됐다. 후지쓰 내부는 물론 언론과 다른 일본 기업들로부터도 수위를 넘었다는 비판이 꼬리를 물었다. 고용환경이 험악해진 것은 이해하지만 일본적 정서를 너무 깔아뭉갠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금융불안과 제조업위기의 이중 덫에 걸린 일본경제를 덮친 또 하나의 광풍은 대량실업과 연쇄도산이다. 불량채권에 묶인 은행이 자금 시장의 펌프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니 기업들은 숨이 가쁘다. 물건을 만들어 봤자 수출 길이 좁아진데다 안에서는 값싼 중국산에 치받혀 배겨낼 재간이 없다. 일본 산업계를 휩쓰는 감원 태풍의 위력은 가히 초특급이다. 통신업계의 공룡인 NTT(일본전신전화)가 전체 인원의 30%에 해당하는 10만여명을 솎아 내고 있는 것을 비롯 전기, 전자, 금융, 철강, 유통 등 절대 다수 업종이 종업원들에게 '사요나라(안녕)'를 요구하고 있다. 종업원과 철두철미하게 고락을 같이해온 마쓰시타전기는 창립 후 최초로 9천여명으로부터 조기퇴직 신청을 받았다. 전직과 해고를 금기시하며 종신고용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웠던 일본적 경영의 완전 붕괴다. 기업들이 일본적 경영과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실업률은 수직상승 중이다. 지난 8월까지만 해도 4%대였던 정부 발표 실업률은 9월 5.3%로 점프한 후 11월에는 5.5%로 치솟았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들은 악재가 겹겹이 쌓여 있다며 6% 돌파도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야마타 히사시 일본종합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002년 여름쯤 6%를 넘긴 후 2003년 말엔 6% 후반까지 갈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디플레와 후발경쟁국의 추격에 걸려 넘어진 기업들의 도산 스피드도 눈에 띄게 빨라졌다. 올들어 지난 10월 말까지의 기업도산건수는 1만6천건을 넘어섰으며 연말까지는 사상 최고였던 98년의 1만9천1백71건을 추월할 것이 확실한 상태다. 구마가이 가츠유키 데이코쿠 데이터뱅크 정보부장은 그러나 "앞으로가 더 문제라며 도산예비군 1백만명, 도산건수 10만시대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탈출구를 잃은 일본경제는 일단 엔화 약세로 숨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들의 반응은 차갑다. 단기처방이라는 지적이다. 고사이 유타카 일본경제연구센터 회장은 "산업구조재편과 인적자본 확충등 근본 대책이 뒤따르지 않는 환율정책은 2차대전후 영국의 쇠퇴를 답습할 뿐"이라고 말했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