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시장의 신뢰를 묻겠다" 일본의 14개 대형 민간은행들이 중간결산 실적을 발표한 지난 11월26일. 기자회견장에 앉은 야나세 유키오 아사히은행장은 적자로 벌겋게 물든 재무제표를 놓고 비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다음날인 27일 일본 언론은 은행들이 불량채권과의 싸움에 진짜 칼을 빼들었다며 감추고 덮어 두었던 '일본적 룰(rule)'이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주목된다고 전했다. 일본 이코노미스트들은 일본발 세계공황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은행들의 거액 불량채권을 꼽는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사실 14개 대형은행이 중간결산에서 떨어낸 불량채권은 2조4천3백억엔에 이르지만 이는 낙엽 몇 장을 치운데 불과하다. 아직 남아있는 불량채권은 20조1천4백억엔으로 상각처리한 것의 8배가 넘는다. 소형은행을 포함하면 회수 불가능한 대출이 32조5천억엔으로 급팽창한다. 은행 부실화로 일본경제가 앓고 있는 합병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은행 자체를 믿지 못하니 증시에서 은행주들에 대한 대우가 바닥이다. 주가가 1백엔 동전 한 닢도 못되는 은행이 수두룩하다. 수십조엔대의 상품주식을 갖고 있지만 증시가 침체 수렁에서 허덕이다 보니 산더미같은 평가손실에 짓눌려 있다. 중간결산에서 14개 은행의 주식평가손실은 3조엔이 넘어 업무순익 2조엔을 1조엔이나 초과했다. 짝짓기를 통해 은행마다 덩치를 키워 왔지만 외부 시선은 싸늘하다. S&P 무디스 등 미국 신용평가회사들은 일본은행들의 신용등급을 모조리 'E'와 'D'급으로 깎아내려 놓고 있다. 산와, 도카이 등이 합쳐져 2002년 4월 단일은행으로 출발하는 UFJ그룹이 내건 자기자본비율은 11.31%이지만 이들도 예외없이 E등급이다. 은행들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금융시스템이 건강할리 만무하다. 은행 불안은 증시위기로 이어지고 금융시장은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대혼란에 빠진다. 미국 엔론사의 도산 후 일본 MMF(머니마켓펀드) 시장에서는 해약 사태가 속출, 6조엔의 자금이 빠져 나갔다. 고이즈미 정권은 불량채권을 앞으로 3년간 절반 수준으로 줄이겠다며 채찍을 들었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들은 금융불안의 뇌관이 깊숙이 박혀 있다며 진짜 고비는 이제부터라고 주장한다. 일각에서는 정부계 금융기관과 보험사 등의 감춰진 부실에 더 주목하고 있다. 특수법인 통.폐합 조치에 따라 상당수가 문을 닫을 정부계 금융기관의 부실이 얼마나 나올지가 걱정이라는 지적이다. 엔화의 달러 환율이 1백30엔대를 돌파하는 등 일본정부가 엔 약세를 유도하고 있지만 이의 부작용 또한 걱정거리다. 외국투자자들의 일본 이탈이 가속화되면 증시가 휘청거리고, 이는 주가 손실을 키워 은행들을 또 한번 골병들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오제키 고요 메릴린치증권 애널리스트는 "불량채권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며 현재 상황은 지난 98년 금융위기보다 더 심각하다"고 지적, "일본정부가 2002년 여름께 금융위기를 정식인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