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에 '1989년의 악몽'이 재현됐다. 연간 5천% 이상으로 치솟는 인플레와 잇단 평가절하로 휴지조각이 다름없게 된아우스트랄화(貨), 높은 실업률, 가망성없는 정부 등으로 불만이 극에 달한 시민들은 닥치는대로 상점 등을 약탈하며 일부 도시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물건을 사기 위해 가게안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가격이 달라질 정도로 극심한 초인플레 상황에서 그나마 직업을 가진 근로자도 아우스트랄화로 월급을 지급받기 때문에 돈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데도 속수무책이었던 라울 알폰신 정부는 그해5월 대선에서 당선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당선자에게 예정보다 6개월 빠르게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태환정책으로 꽁꽁 묶인 지금의 인플레 사정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훨씬 낮지만 사상 최악의 실업률과 외채(1천320억달러), 4년째 지속되는 경제난, 초긴축으로 인한 월급과 연금의 대폭 삭감, 은행예금의 부분 지급동결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근로자와 실업자들이 다시 거리로 나선 점만은 그때와 다름없다. 메넴 정권의 유산으로 `빈털터리 국고'를 넘겨받은 페르난도 델라루아 대통령의중도좌익 연립정부는 97년 10월께부터 시작된 경제난을 수습하려 안간힘을 쏟았지만때마침 불어닥친 아시아의 경제위기와 브라질의 헤알화 폭락사태 등으로 오히려 된서리만 맞았다. 메넴 전대통령은 집권시절 `자유시장 경제정책'이란 미명아래 대부분의 국영기업체를 민영화하며 약 400억달러의 외화를 끌어들였지만 이중 절반 가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민영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전기.전화.수도료 등 공공요금이 일제히 올라 서민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민영화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가 해소되지 않자 메넴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등 다국적 금융기관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됐다. 결국 아르헨 경제는 메넴 임기동안 다시 IMF 관리체제하에 들어갔으며, 외채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면서 97년말부터 경제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12월 취임한 델라루아 대통령은 이 때문에 집권 2년동안 모두 9번째의 긴축조치를 발표해야 했다. 이는 물론 재정적자 축소를 목표로 한 IMF의 요구에 따른것이지만 긴축조치의 희생자는 그때마다 근로자와 연금생활자 등 서민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올들어서는 봉급과 연금지급액을 13%씩 일률적으로 깎은데다가 지난 7월이후 금융위기로 현금부족에 시달리던 정부가 외채상환 압박에 못이겨 최근 은행예금을 부분동결하고 민간연금기금을 이용해 정부 채권을 환수하는 방안이 발표되면서서민층을 더욱 옥죄었다.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내수가 죽어가면서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고, 외국인 투자가들마저도 자본을 철수하면서 국내 실업률은 잠재실업을 포함, 사상 최고인 35%선에 이르렀다. 국민의 분노는 1차로 지난 13일에 표출됐다. 아르헨티나 노총과 근로자연맹이주관한 24시간 총파업에 공공부문 근로자를 포함한 산별노조 대부분이 참가하면서델라루아 정부 취임이후 최대 규모의 파업이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발생한 소요사태는 지난주 총파업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상업도시인 로사리오시에서 지난 주말 몇 차례의 약탈시도 사건이 기폭제가 돼 약탈과 방화가 인근 엔트레리오스주와 코르도바주, 산타페주등으로 번지면서 곧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특히 델라루아 대통령과 도밍고 카발로 경제장관의 출신지역인 코르도바주에서는 성난 시위대가 주정부 청사까지 난입, 사무실에 불을 지르고 점거농성까지 벌이는 등 `무정부 상태'에 빠트리기도 했다. 델라루아 정부는 긴급 각료 및 주지사 회의를 소집하고 야당지도자들의 협조를당부하는 등 해결책 마련에 나섰지만 `국고가 텅빈' 상태에서 뾰족한 해결책이 나올리가 없다. 19일 오전(현지시간) 긴급 각료회의를 위해 승용차에서 내리던 델라루아 대통령은 성난 군중으로부터 날아든 계란과 돌멩이 세례를 받아야 했다. 중도좌익 정치인으로 부패추방과 사회.경제 분야의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며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가 집권 만 2년만에 성난 군중의 야유와 돌멩이 세례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성기준특파원 bigpe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