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주먹 O씨. 사채업과 건물 임대 등으로 큰 돈을 번 그는 지난해 서울 강남에 벤처빌딩을 세웠다. 벤처기업을 수용하는 빌딩을 지으면 등록세와 취득세를 면제받고 종합토지세도 50% 감면받을 수 있다는 '사업 메리트'가 신규 사업 진출의 한 요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벤처빌딩을 지으면 정부로부터 '벤처사업가'로 인증받게 돼 '신분 세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그에겐 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신분을 세탁했다고 해서 그의 행태까지 달라지지는 않았다. O씨는 입주업체들을 대상으로 고리(高利)의 돈놀이를 했다. 그는 돈을 못갚는 업체를 조직을 동원해 괴롭히다 끝내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다. 벤처 비즈니스가 정부의 특혜 지원을 등에 업고 '돈되는 사업'으로 떠오른 3,4년 전부터 강남의 벤처 타운은 주먹들의 또다른 '사냥터'로 변했다는게 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현 정부 출범 초에만 해도 30여개에 불과했던 창업투자회사가 지난해 한때 1백50여개로까지 급증했던 것이 조폭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이같은 주먹들의 '발호(跋扈)'가 IT(정보기술) 산업의 침체 등으로 가뜩이나 위축돼 있는 벤처업계에 피멍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이 끊이지 않는다. 투자한 원금에다 이자까지 붙여 갚으라는 조폭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기업들의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소액 투자자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벤처 사장이 공금을 유용한 사건의 대부분은 단순 사기사건으로 종결되고 있다. 하지만 피해를 호소한 소액투자자들에게는 거의 어김없이 주먹들의 '폭력 보복'이 뒤따른다"(벤처 인큐베이터 R사 S사장) 이렇게 벤처업계에 조폭들이 만연하게 된 데는 잘못된 제도를 운영해온 정부도 일조했다고 업계에서는 분통을 터뜨린다. "정부가 전시형 벤처 지원 실적에 매달리는 바람에 옥석을 가리지 않고 지원을 남발, 조폭들을 끌어들인 셈이 됐다. 몇가지 서류를 조작하고는 식은 죽 먹기처럼 벤처기업 인증을 타냈다는 조폭들의 '자랑'을 들은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아예 서류 조작을 전문으로 하는 '벤처 브로커'가 신종 비즈니스로 성업하고 있을 정도다"(M벤처리서치사 K대표) 벤처업계를 조폭들의 횡포로부터 차단할 뾰족한 근절책이 없다는 건 더욱 큰 문제다. 피해를 당한 쪽에서 보복을 두려워해 '없던 일'로 덮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 조폭들의 '횡포'가 워낙 교묘하게 자행돼 실체를 잡기가 쉽지 않다고 검찰 등 사직당국은 하소연한다. 벤처에 침투한 조폭 조직에 대한 체계화된 정보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 관계자는 실토했다. '어떤 업체 사장은 OO파 중간 보스' '어떤 기업은 누가 뒤를 봐준다'라는 온갖 '카더라' 통신만 난무할 뿐이다. 경기 한파에 더해 벤처기업인들의 시름만 깊어가고 있다. 김태철 기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