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18일 저녁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 입구. 세계 각국의 유명 디자이너들과 영화계 톱스타 수 백명이 차례로 검은색 리무진에서 내려 미술관으로 입장한다. 마치 대형 국제영화제를 방불케 하는 이 모임은 다름아닌 패션계의 황제 조르지오 아르마니 패션 인생 25주년 회고전 개막행사다. 구겐하임 뮤지엄이 아르마니의 예술성과 작가정신을 높게 평가해 회고전을 개최키로 한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가 이같은 대우를 받기는 구겐하임 뮤지엄 개관이래 처음이다. 3개월간의 계속된 이 회고전에는 아르마니의 창작세계를 잘 보여주는 이브닝 드레스와 영화에 쓰였던 의상,액세서리 등 총 4백여점이 전시되었다. 한마디로 아르마니 패션 25년사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전설적 디자이너 샤넬과 함께 20세기 패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디자이너로 꼽히는 이탈리아인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패션계에 입문을 한 것은 27세라는 늦은 나이다. 처음엔 의사가 되기 위해 밀라노 의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리나상티 백화점에 입사하여 전시장 담당 일을 맡으며 패션과의 만남이 시작됐다. 이어 니노 체루티에서 남성복 스타일리스트를 거친 그는 72년 첫 개인 컬렉션을 발표했다. 74년에는 아르마니라는 자신의 매장을 개점하고 여성복 디자인에도 손을 댄다. 유행을 창조하는 헐리우드 영화계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건 70년대말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를 맡으면서였다. 이를 계기로 아르마니는 헐리우드 스타들의 인기 디자이너로 부상하게 되며 이와 동시에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의 이름이 해외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디자인은 결코 화려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일체의 과장이나 기교가 절제된 라인은 단순함과 우아함이 특징이다. 의상 색깔도 눈에 띄는 화려한 색이 아니라 뉴트럴 컬러가 주를 이룬다. 그래서 그는 "현대적이고 절제된 차분함으로 우아한 화려함을 가장 잘 표출해내는 최고 거장"이라고 불린다. 아르마니 의상의 진가는 쇼 윈도우에 진열됐을 때보다는 입었을 때 나타난다. 이는 완벽한 재단이 디자인을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 "아르마니를 입는 사람은 패션의 희생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옷을 통해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인다"는 게 패션 전문가들의 평이다. 오늘날 아르마니 그룹은 전세계 패션과 디자인을 선도하고 있다. 세계 33개국 2백50개 매장에서 판매돼 연간 매출액은 57억 프랑에 달한다. 또한 아르마니는 세계적 명성과 함께 막대한 개인적 부도 쌓았다. 지난해 그는 무려 6천만달러의 수입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고 세금 또한 가장 많이 냈다. 지난 4월 스페인 빌바오 뮤지엄에서 또 다시 아르마니 축제가 개최됐다. 미국 전시회를 놓친 유럽 팬들을 위한 빌바오 구겐하임 회고전 역시 극찬을 받았다. 유럽 주요 언론은 "아르마니의 작품 구상에서부터 컨셉트 그리고 완성까지의 과정을 보여준 회고전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모던하고 웅장한 건축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고 평했다. 구겐하임 초대전을 통해 아르마니는 이제 창작 예술가로 부상했다. 패션 역사상 디자이너가 예술가로 격상된 케이스는 아르마니가 처음이다. 파리=강혜구 특파원 bellissim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