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시절 노태우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다. 독일 기업인들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고속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던졌다. 노 대통령이 머뭇거리자 곁에 있던 고 최종현 SK회장이 대신 나섰다. "관리들이 반도체가 뭔지 잘 몰랐던 덕" 이라는 당시 그의 설명은 지금까지도 기업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얘기로 회자되고 있다. 독일 기업인들이야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동석했던 한국의 기업인들은 "관리들이 반도체가 뭔지 알고 간섭하려 들었다면 반도체산업의 눈부신 발전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관료주의의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거의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자원부가 전국의 4백여 기업을 대상으로 지난 7월 중순부터 한달반 동안 실시한 기업 규제에 관한 현장 실태조사에서 기업들은 한 목소리로 관료주의적 발상이 고쳐지지 않고 있어 걱정이라는 하소연을 쏟아냈다. "정부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행정 편의주의적 규제는 물론 부처 이기주의에 따른 혼선.중복 규제도 많다"거나 "제대로 지켜질 가능성도 없는 규제를 일률적으로 강제하려 한다"는게 기업인들의 불만.현 정부 들어 '규제개혁위원회'라는 별도 기구까지 만들어 대대적인 규제 완화를 단행하고 있다지만, 관료주의의 벽에 부딪쳐 기업들이 체감할만한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출자총액제한제 개선책'과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한도 확대 방안'을 보면 기업들이 왜 이런 평가를 내리는 지 쉽게 알 수있다. 정부는 △순자산의 25%로 묶어놓은 출자총액제한을 풀어주되 초과 주식에 대해선 의결권을 제한하고 △산업자본의 은행 보유지분 상한을 4%에서 10%로 늘리되 이 역시 4% 초과 지분에 대해 의결권을 박탈하겠다는 '편법'을 추가, 규제완화의 대안으로 내놓았다. 규제를 완화했다는 소리는 들어야겠고, 기업의 요구대로 다 해주기는 뭔가 꺼림칙하고… 그런 어정쩡한 입장에서 규제완화에 접근하다 보니 실효성 없는 규제완화 방안이 나왔다고 볼 수있다. 경제정책의 우선 순위가 언제나 정치 논리와 '국민정서법'(일명 '떼법')에 밀리기 일쑤라는 점도 위기에 처한 기업 및 국가경쟁력 약화 문제와 직결돼 있다. 일관성이 없어 예측 불가능한 기업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앨런 팀블릭 마스타카드 코리아 대표는 이와 관련, "한국에서 외환위기 이후 재벌에 대한 비판은 거의 유행이 됐다. 최근까지 한국 경제의 빠른 성공과 성장을 주도해온 주체가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받은 재벌인 점을 감안하면 이는 먹이를 주던 손을 물어뜯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현 정부 출범후 광범위하게 유포된 '재벌 해체론'은 섣부른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억누른 단적인 예다. 외환위기의 책임을 기업에만 떠넘기려는 정치권과 관료들의 책임 회피를 위한 편의주의적 발상이 낳은 사생아 정책이란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송병락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저서 '기업을 위한 변명'을 통해 재벌의 소유와 경영에 대한 섣부른 분리 시도나 전문화 유도정책은 국가 전체의 성장 잠재력을 잠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송 교수는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우리 국민들은 왕가의 그릇된 행태를 싫어한 나머지 그들이 쓰러지길 바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왕가가 망하고 나니 나라마저 덩달아 망해 버렸다"라는 같은 대학 신용하 교수의 말을 빌려 재벌해체론이 같은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 특별취재팀 =이희주 산업부장(팀장) 이학영 손희식 김성택 김태완 김수언 이심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