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를 매년 꾸준히 쓰는 주부는 얼마나 될까. 주부 1백명중 한 사람 정도,혹은 1천명중 한 사람,아니 어쩌면 1만명에 한 사람도 안될지 모르겠다. 얼마전까지 매년 저축의 날 무렵이 되면 가계부를 꾸준히 써온 주부들이 상을 타곤 했다. 얼마나 안 쓰면,그런 상까지 줄까. 가계부는 가족의 돈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그건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삶에 대한 반성 없이 산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가계부는 반드시 써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쓰면 더 좋다. 그것도 오래 규칙적으로 쓰면 쓸수록 더 좋다. 가계부를 쓰면 돈과 관련된 우리 가족의 삶을 객관화해 볼 수 있다. 계획도 적고 실행도 적고,그 불일치도 적어 냄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가계부를 즐겁게 오래오래 써서 그걸 바탕으로 가족 삶의 질을 높이느냐 하는 것이다. 가계부를 즐겁게 오래 쓰려면 세가지 고정관념을 벗어 던져야 한다. 첫째 반드시 모든 항목을 다 써야한다(?). 고정지출부분은 가급적 자동이체시스템을 활용하고 해당 영수증만 붙여 시간을 줄인다. 지출이 유동적인 항목이나 가족에게 중요한 항목만 골라 단순화시켜 써도 된다. 또 자신이 알고 싶은 항목이나 주제별로 간략히 적는 것도 방법이다. 환경에 관심이 많은 주부는 녹색가계부를,신용카드 사용이 많은 가계는 신용가계부를,아니면 옷가계부,외식가계부만 써도 어떠랴. 둘째,반드시 주부만 써야 한다(?). 남편이나 아이들과 역할을 나누자. 전반적인 관리를 주부가 책임지더라도 아이에겐 녹색가계부를,남편에게는 신용카드부분을 맡겨도 된다. 이러한 분담이 처음에는 주부를 더욱 번거롭게 하겠지만,장기적으로는 가족들을 가계관리와 계획에 적극 참여케 하는 효과를 낳는다. 만약 남편이 시간이 없고 귀찮다는 이유로 끝내 거부하면 어떻게 할까. 결론은 간단하다. "시어머니 아들에 신경쓰지 말고 내 아들이나 신경쓰자!" 우리 아이들이라도 어려서부터 금전관리기록이 습관이 되도록 이끌어 주자. 셋째,반드시 돈에 대해서만 써야 한다(?). 가계부라고 해서 금전관계만 적을 필요는 없다. 우리네 삶에서 돈이 개입되지 않는 행동이 어디 있는가. 돈과 함께 한 추억,돈으로 살 수 있었던 특이한 물건,돈으로 만난 사람과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주제의 폭을 넓혀보자. 시간이 없어 가계부 일기장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 쓴다면 과감하게 그 기능을 통합하고 새로운 성격을 만들어가라. 가계부는 아날로그 방식이 좋을까,디지털 방식이 더 나을까. 종이에 그냥 쓰는 아날로그 방식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휴대가 간편하다. 영수증을 그냥 붙일 수 있다. 손 때 묻은 추억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이것은 곧바로 디지털 방식의 단점이기도 하다. 디지털 방식은 그러나 컴퓨터가 자동으로 결산을 해주기 때문에 시간이 절약된다. 또 가계전문가가 된 기분을 들게 한다. 가계부는 때와 장소도 가린다. 가계부는 수시로 터져야 하는 게 아니다. 데이트 약속을 정할 때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이 좋다. "매주 수요일 저녁,식탁에 앉아서,오랜만에 모차르트도 좀 틀고,누구누구와"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라. 그 날을 위해서 일주일 동안 지출된 영수증이나 간이 메모를 지정된 서랍에 수시로 넣어 둬라. 마지막으로 가계부는 훌륭한 개인사(個人史)자료임을 잊지 마라. 개인의 아주 사소한 기록도 오래 축적되면 개인과 가족에게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엄청난 정보창고가 된다. 또 누가 알겠는가. 우리 딸 아들이 훗날 경제학자나 가정학자가 되어 엄마의 가계부를 연구자료로 요긴하게 쓰게 될지. 아니면 30~40년을 충실히 써온 나의 가계부가 타입캡슐에 담겨져 2200년쯤엔 국보로 지정될지. 이쯤 되면 비장한 각오 한마디 할 법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주부는 죽어서 가계부를 남긴다" "자,그럼 나도 이제부터 가계부 한번 다시 써볼까. 그런데 벌써 10월이나 됐으니,내년부터 쓰는게 좋겠지" 절대 아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그리고 내년까지 충분히 시행착오를 즐겨라. 그 결과 자기 가족만의 가계부 스타일을 정립하라. /배순영 한국소비자보호원 정책연구실 선임연구원 consumer119@cpb.or.kr 글쓴이 약력=1966년생.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졸업.소비자아동학 박사.기전여대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