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 국가 일본의 낡은 껍질을 깨부수는 파이어니어' 외부 세계를 향해 철벽같은 담을 둘러 놓고 일본인만을 최고경영자(CEO)로 고집했던 일본기업의 '순혈주의' 경영이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외국인 CEO들의 새 얼굴이 자동차 정보통신 등 다양한 업종에서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외국인 CEO들의 활약이 가장 눈부신 업종은 단연 자동차다. 지난 99년 결산에서 6천8백43억엔의 적자를 냈던 닛산자동차가 프랑스인 카를로스 곤(47) 사장의 수술을 받고 1년만에 흑자기업으로 대변신한 후 일본 재계에서는 '곤류(類)개혁'이 유행어로 각광받았다. 정확한 진찰과 신속과감한 처방으로 중증의 환자를 20대의 건강한 체질로 탈바꿈시킨 그의 치료법을 본받자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대규모 리콜 은폐가 들통난 후 창사후 최대의 위기 수렁으로 전락한 미쓰비시자동차는 개혁드라이브의 채찍을 독일 다임러 벤츠 출신의 롤프 에크로드(58) 사장에게 맡겼다. 그는 일본인인 소노베 다카시 사장과 2인3각 체제로 미쓰비시를 수술중이지만 곤 사장의 처방을 철저히 벤치마킹하고 있다. 일본 재계에서는 생산코스트 15% 삭감, 9천5백명 감원 등의 목표를 내건 에크로드 사장이 제2의 닛산신화를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인지가 또 하나의 관심거리다. 그는 취임 직후인 지난 2월 실험을 제대로 끝내지 않은 자동차의 판매계획을 보고했다며 부하직원들에게 불호령을 내렸을 정도로 무사안일 추방에도 앞장서고 있다. 마쓰다자동차의 지휘봉도 외국인이 들고 있다. 미국인 마크 필즈 사장은 마쓰다자동차에 미국식의 합리적인 경영방식을 도입,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폐쇄껍질이 두껍기로 악명 높은 통신업계에서도 외국인 사장이 최근 탄생했다. 일본텔레컴은 계열 휴대폰 회사인 J-폰 4개사를 오는 11월 하나로 합칠 계획을 발표하면서 사장에 영국 보다폰이 파견할 다릴 그린(41)을 선임했다. J-폰은 NTT도코모를 상대로 치열한 시장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그린 사장의 등장은 글로벌 경쟁의식과 국제화 마인드 무장에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게 일본 재계의 분석이다. 외국인 CEO들 중에는 자신이 일본 시장에 새로운 비즈니스의 씨앗을 뿌리겠다며 아예 회사를 세운 파이어니어들도 적지 않다. 벤처투자업체인 선브리지의 앨런 마이너(40) 사장은 일본 정보기술(IT)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외국인 CEO다. 그는 브리검영 대학의 학생시절 선교사로 일본 땅을 밟은 것이 인연이 돼 일본 오라클의 사장을 역임하며 큰 돈을 벌었다. 벤처산업 발전에 후견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그는 유.무형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벤처 전도사로 각종 세미나와 발표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일본이 쳐놓은 그물과 장벽에 도전하는 외국인 사장은 유통업종에서도 탄생하고 있다. 나고야에 본사를 둔 오클론마케팅의 로버트 로치(39) 사장은 TV홈쇼핑으로 일본의 고물가및 불합리한 상관행과 맞서 싸우고 있다. 그는 외국인과 외국 상품에 잠재적 불신을 갖고 있는 일본 소비자들을 유통마진을 대폭 압축한 다이렉트 마케팅으로 공략하며 맨주먹으로 일본에서 창업한 회사를 중견기업으로 키워 냈다. 일본기업의 파란 눈 사장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 확실하다. 장기불황에 병든 일본기업들이 하나 둘씩 구미기업으로 넘어가고 있는데다 업종도 금융 부동산 레저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식 경영시스템과 낡은 사고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일본 기업의 반성도 외국인 CEO의 등장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