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의 기습적인 법정관리는 결국 원천봉쇄됐다. 지난회에서 취재팀이 발굴보도했던 김우중 최후의 승부수 "법정관리"는 그룹내에서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정부의 서슬이 퍼랬으니 법정관리를 준비해줄 변호사 하나 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헌재 등 구조조정 '기술자'들이 나설 순서였다. 그들은 지금도 "시장을 지켜냈고, 사상 처음으로 해외빚을 떼먹었으며 대우를 쪼개 대우조선 건설 종합기계를 살려냈다"고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30조원에 가까운 공적자금이 쏟아부어졌고 시장의 룰이 무너졌고, 금융은 다시 철저한 관치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은 바로 이 이야기다. 결국 워크아웃으로 채권단이 대우에 지원하기로 했던 신규자금 4조원은 99년 7월26일에야 지원됐다. 김우중 회장이 사재를 포함한 10조원의 담보를 제공하고 겨우 얻어낸 4조원이었다. 담보비율 2.5배의 대우로서는 억울한 조건이었다. 그나마도 1주일 이상 골탕을 먹인 다음에야 돈이 들어 왔다. 당장 숨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날 수도 없는 상황, 즉 가사(假死) 상태로 들어섰을 뿐이었다. 한달여 뒤인 8월26일 대우그룹은 드디어 통째로 워크아웃에 밀려들고 말았다. 그러나 이 한달은 말그대로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었다. 이미 시장에서는 투신사에서 하루에 1조원씩 터져 나가는 일대 충격파가 번져가는 중이었다. 대우채 환매금지 조치가 발동된 것이 8월12일이었으니 더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시장 붕괴가 초읽기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강봉균 재경부장관이 8월20일께 엄낙용 차관 이하 주요 간부들을 급히 집무실로 불러모았다. "각자 대우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걸 솔직이 말해봐. 시간이 없어" 강 장관의 눈동자가 재빨리 참석자들을 훑었다. 그 자리에는 차관 외에 이근경 차관보, 유지창 금융정책국장, 양천식 국제금융 심의관, 권오규 경제정책 국장, 조원동 정책조정 심의관, 최중경 금융정책과장, 임종룡 은행제도과장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 회의에서 무조건 결론을 내야 한다는 긴장감이 참석자들의 얼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장이 믿지 않고 채권단도 수십개에 달해 합의가 불가능할 겁니다. 워크아웃에 넣는 외엔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임종룡 과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반대 견해가 있을 수도 없었다. 모두가 이심전심이었다. 무려 7만5천개에 달하는 거래처들의 줄도산이 뻔한 터에 법정관리라니... "계열사 중에 몇개나 집어넣어야 돼?" 강 장관이 다시 물었다. 재경부는 당초 (주)대우 대우자동차 대우전자 대우중공업 등 부채가 많은 4개사를 염두에 뒀다. 그러나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그룹 전체를 워크아웃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위원장의 판단이 받아들여졌다. 결국 정부는 8월23일 오후 대우그룹 전부(12개 주력사)를 워크아웃 틀에 집어넣는다는 공식 결정에 도달했다. 한국경제신문은 이날 늦게, 즉 24일자 시내판 기사로 "대우그룹 워크아웃 결정"이라는 제목의 긴급기사를 날렸다. 재경부를 맡고 있던 임혁 기자(현재 금융부 근무)의 특종이었다. 팩스로 보내온 신청서 대통령에 대한 워크아웃 보고는 이기호 경제수석이 맡았다. 이 수석이 장병주, 정주호 사장의 법정관리 계획을 듣고 "험한 꼴 볼 것"이라며 돌려보낸 다음이기도 했다. 금감위의 서근우 심의관이 결국 총대를 매고 대우에 워크아웃 방침을 통보했다. 문제는 법정관리라는 최후의 반격까지 시도했던 대우가 수긍하느냐였다. 초긴장 상태로 며칠이 지나갔다. 대우는 워크아웃 신청서를 제출하기를 계속 거부했다. 금감위는 몇번씩이나 워크아웃 신청서를 대우그룹에 보내 서명을 종용했다. 다음은 대우 관계자의 증언. "청와대에도 달려가고 금감위에도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모두 묵살됐어요. 결국 26일 오후4시30분 워크아웃 신청서를 작성해 금감위에 팩스로 보냈습니다. 그룹의 종말을 고하는 서류에 누군들 쉽게 서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일은행에 낸 공식 워크아웃 신청서는 구조조정본부의 K상무가 들고 갔다. 신청서에는 12개 계열사 대표들이 서명했다. 빈손으로 일어서 한때나마 세계를 도모했던 32년 대우그룹의 종말이었다. 김 회장은 해외에 머물러 있다가 25일 정.재계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들어 왔지만 다시 26일 아침 김포공항을 통해 빠져 나갔다. 이번 김 회장의 행선지는 우즈베키스탄이었지만 그곳에서도 더이상 할일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부적절한 워크아웃 그러나 대우그룹은 워크아웃에 집어넣기에는 덩치가 너무도 컸다. 얽히고 설킨 대우그룹의 보증채무와 담보, 복잡한 계열사간 거래구조가 장애물이었다. 워크아웃 성공가능성은 처음부터 희박했다. 금감위 일각에선 워크아웃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2~3일정도 전 은행의 영업을 정지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물론 은행문을 닫으면 더 큰 충격파가 터질 것이 뻔했다. 제일은행은 워크아웃이 공표되기 전날인 8월25일 밤을 새워 채권단회의를 준비했다. 26일 오후 6시에는 억지로 채권단 결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대우가 내놓은 공동담보(10조원)와 공동DA(6억달러)가 계열사간에 뒤엉켜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불거져 나왔다. 담보를 제공한 계열사와 차주(借主)가 달랐다. 한쪽에선 매출채권으로 기재된 것이 다른 쪽에선 아예 장부에서 누락되어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외환은행의 주원태 이사가 채권단회의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출발부터 난항이었다. 워크아웃 전문가인 이성규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에게 중재역할이 떨어졌다. 채권단 자율조정기구인 기업구조조정위원회는 그해말까지 무려 53개의 대우 워크아웃 지침과 설명서를 만들어 채권단의 이해를 조정해야 했다. 다음은 이성규 국장의 증언. "다른 기업은 협약외 채권자가 보통 5% 이내인데 대우는 15%나 됐습니다. 일단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은행 투신 등 협약채권자가 일방적으로 손해보는 구조였어요. 결국 대우 처리의 큰 틀은 워크아웃 절차를 따랐지만 내용면에선 다른 워크아웃 기업과 많이 달랐습니다" 금융기관들로선 모든 채권자가 동등하게 빚잔치에 참여하는 법정관리가 차라리 손해를 덜 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대우의 해외부채와 개인이나 법인이 보유한 협약외 대우채권들은 나중에 자산관리공사가 일괄 매입했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워크아웃에 직접 참여한 셈이었다. [ 특별취재팀 :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