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회에 우리는 김우중 회장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두개의 주제를 다룬다. 하나는 김우중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다. 김우중 회장이 더이상 김대중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한 것은 대통령 주위의 관료집단이 적극적으로 기회를 차단한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었다. 독대가 봉쇄된 다음 김 회장은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이견이 많기 때문에 그중 한편만을 별도의 박스에 소개하는데 그친다. 또 하나의 주제는 내부로부터 제기된 반발이다. 대우그룹 사장들은 대부분 김 회장과 절대적인 충성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이 관계가 무너져 내렸다. 반발은 사장단회의에서 터져 나오고 말았다. 강한 카리스마 김 회장의 1인 독주체제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리츠19칼튼 호텔의 회동 99년 5월5일 어린이 날이었다. 대우그룹에 근무하려면 어린이날 따위는 잊어야 했다. 서울 강남에 있는 리츠칼튼 호텔. 오전 9시께 검정색 체어맨이 잇따라 호텔 정문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주)대우 장병주, 대우자동차 강병호, 대우중공업 추호석(종합기계 부문) 신영균(조선부문), 대우전자 양재열, 회장부속실 정주호, 구조조정본부 김태구 사장이 차례로 회전문을 밀었다. 이경훈 서형석 (주)대우 회장도 무거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김우중 회장은 오지 않았다. 아니 이날 모임은 김 회장에게 통보조차 되지 않았다. 모두가 이심전심이었지만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은 회장에 대한 불만, 당장 오늘 내일 돌아올 어음들에 대한 두려움, 풍전등화보다 암울한 그룹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감 뿐이었다. 그래서 사장들만 모여보기로 한 것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는게 아닙니까. 회장님은 무슨 복안을 갖고 있는 겁니까" 소장파에 속하는 한 사장이 침묵이 부담스럽다는듯 말문을 열었다. 하루 하루 빙판길을 걷기는 모든 계열사가 똑같았다. "자동차 딜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방법이라도 생각해볼 것 아닙니까" 다른 사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주력사인 (주)대우를 이끌고 있는 장병주 사장이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입을 열었다. 답답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놔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 회장에게만 미루지 말고 우리도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구조조정본부 김태구 사장은 "회장도 어려운 상황을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라며 말을 흐렸다. "아니 법정관리로 가든지 워크아웃으로 가든지 큰 그림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룹 본부에선 뭘 하는 겁니까. 차라리 법정관리로 갑시다" 드디어 "법정관리"라는,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이 터져 나왔다. "누가 두손 놓고 있는줄 아세요. 직접 들어와서 해보세요" 고성이 오가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문제 해결에는 한치도 접근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들만 테이블에 쌓여 갔다. "힐튼호텔이라도 팔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자리에 계신 선배님들도 말씀 좀 해보세요. 원로분들이 이렇게 가만히 계시면 어떻합니까" 이경훈 서형석 대우 회장 등 원로들에게도 직격탄이 날아갔다. 사표 4시간 동안 격론을 거듭한 후 사장들은 자신들의 뜻을 김 회장에게 확실히 전하는 뜻으로 집단사표를 내기로 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날 회의에서였다. 결의된 내용은 6월말 사장단 대거 퇴임과 무보수 결의로 표면화됐다. "매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판다"는 것도 사장단회의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실적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당장 힐튼호텔 매각은 김 회장의 부인 정희자 여사의 반대에 부딪쳤고 다른 자산들은 원매자들조차 뒤로 몸을 빼는 분위기였다. 대우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이 천하에 드러난 상황에서 결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면 무너질 터였다. 무력한 사장들 자금난이 심화된 99년 4월 이후부터는 계열사 사장들이 김 회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조차 꺼렸다. 김 회장의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사장들은 고함을 질러야 했지만 나쁜 뉴스를 들고와 김 회장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를 수는 더욱 없었다. 불행히도 김 회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을 때 그를 대신해 그룹을 끌고갈 수 있는 시스템이 대우에는 없었다. 한결같이 화려한 경력을 지닌 사장들이었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을 직접 내려본 적이 없는 무력한 사장들이기도 했다. 32년 대우그룹 역사에서 사장들이 집단적으로 김우중에 도전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김 회장도 이런 정서를 어느 정도 감지했다. 99년 6월 30일엔 대우 계열사 사장단 50명?결국 일괄 사표를 냈다. 이중 17명만이 재신임을 받았다. 김 회장으로서는 너무도 늦게 사장단의 존재를 인정하게 됐다. 7월19일 구조조정 계획이 확정된지 1주일 만인 26일 김 회장은 사장단을 부평 자동차공장으로 불렀다. 외부에 구조조정 의지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강도높은 방안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30일에는 대우센터 지하 구내식당인 피치가든에서 김태구 사장 등 사장단과 1천6백원짜리 한식 식사를 함께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대우는 김 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돌파 체제였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고도의 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비상시에는 명령 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체제이기도 했다. 문제는 소위 기업지배구조였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김 회장 주변풍경도 바뀌어갔다. 그의 인재풀이기도 했던 경기고 동문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 회장은 98년 1월 경기고 동창회장에 추대됐지만 행사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권력 핵심층이 툭하면 경기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터여서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99년 1월 14일 열린 신년하례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신년하례회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고건 서울시장, 임창렬 경기도지사, 김원길 민주당 의원 등이 참석했다. 김 회장으로서는 점차 고립무원이 되어간 한 해였다. 권력이 떠나고, 사장들이 떠나고, 친구들이 떠나갔다. 11월에는 스스로가 떠나갔다. 10만 대우 가족을 뒤로 한 채 언제 돌아올지 모를 이국행이었다. [ 특별취재팀 :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