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해서 '주식 좀 사라'고 성화야. 하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가 손실이 나면 금감위가 책임져 주나. 그냥 알았다고만 해놓고 버티고 있는 중이지" 지금은 물러난 모 시중은행 고위관계자가 올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지난해 주가 폭락으로 개미투자자 1백조원 손실' 등의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한지 얼마 안돼서였다. 앞서 한 금융당국자는 "기관투자가들이 증시에서 제 역할을 안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전후 사정으로 볼 때 당국이 개미투자자들의 울분을 진정시키기 위해 금융기관 '팔목 비틀기'에 나선 것이라는게 그 관계자의 해석이었다. 사실 금융시장을 완전히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 두는 나라는 없다. 문제는 우리 금융당국의 경우 긴급 사태가 아닌 경우에도 너무 자주 스스로가 '보이지 않는 손'이 되려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개입 동기도 시장의 효율성을 복원한다기보다 '사회적 형평'에 맞춰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신용불량자 사면 조치도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다. 정부는 은행연합회로 하여금 지난 4,5월 두달에 걸쳐 신용불량 기록을 갖고 있는 사람중 연체금액을 상환한 1백53만명의 기록을 일괄 삭제토록 했다. 개별 금융사가 자체적으로 과거 신용불량 기록을 계속 보유하는 행위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고객의 신용정보가 곧 금융사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최근 신용카드 연체율이 다시 높아지는 현상을 이같은 무리수에 따른 후유증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올초 금융당국이 신용평가회사들에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평가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한 것도 이와 유사한 케이스. 투자적격등급의 한계선상에 있는 기업들이 회사채나 CP(기업어음)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 주문 덕분인지 올 상반기중 기업들의 신용등급 '상향조정' 러시가 이어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부 증권사들이 이같은 신용등급 무더기 상향조정이 투자자들의 판단을 흐리고 있다며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례는 대우차 매각 건이다. 정건용 산업은행 총재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대우차 부평공장의 청산 가치는 2조원, 존속 가치는 9백억원"이라고 밝혔다. 부평 공장을 폐쇄하면 땅값 등만으로도 2조원을 받을 수 있는데 고용 유지를 위해 제너럴모터스(GM)에 판다면 9백억원 이상 받기 어렵다는 얘기다. 정 총재는 "경제논리로만 따지면 당연히 청산하는게 정답이지만 그럴 수 없는게 현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정 총재의 이같은 고민은 산업은행도 결국은 광의의 정부기관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정책 당국자들이 '시장의 효율'과 '사회적 형평' 사이에서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임혁 기자 limhyu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