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시중에 돈을 두 배로 풀고 초(超) 저금리정책을 펴고 있는데도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금리 인하로 예금 실질이자가 마이너스가 되고 대출금리가 사상 최저치로 내려앉았지만 채권수익률만 떨어질 뿐 증시 투자 소비 등으로 자금이 흐르지 않는 탓이다. 이런 와중에 경제성장률이 추락하고 생산 및 수출 위축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한국 경제에 나타난 징후들이다. 이를 '10년 불황'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일본의 상황에 대입해봐도 별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제로(0) 금리' 정책에도 불구, 성장률과 물가가 마이너스로 추락한 일본식 '유동성 함정'의 기미가 엿보인다는 얘기다. 우리 정부의 저금리정책은 한국 경제에 약(藥)이 아니라 독(毒)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많다. 재정을 동원해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여력이 충분치 않은 터에 금리 정책마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다. 일본식 유동성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한국 경제호(號)를 건져낼 더이상의 마땅한 정책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 기능을 상실한 금리 =요즘 3년만기 국고채 수익률은 연 5.6%선. 우량 회사채(AA-)도 6.9% 선으로 7% 밑으로 내려왔다. 은행 정기예금은 연 4%대, 기업 대출금리는 연 7%대로 사상 최저치다. 외견상 한은의 콜금리 인하효과가 금융시장에는 효과를 미쳤다는 얘기다. 금리 수준으로 보면 기업들이 활발히 투자하고 소비도 늘며 주가도 올라야 정상이다. 그러나 투자는 상반기중 5% 가량 줄었다. 지난 6월 산업은행의 조사에서 올 하반기 설비투자가 1%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지만 7월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잘나가던 삼성조차 반도체경기 추락 속에 투자를 2조원 줄이는 판이다. 소비 증가율도 작년에 비해 절반(작년 9.8%→올 2.4분기 4.3%)으로 떨어졌다. 어딘가 엇나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 이유는 딴 데 있다 =저금리에도 기업이 투자를 안하는 것은 금리 탓이 아닌데 정부는 금리 수준에서 원인을 찾는 분위기다. 한은이 콜금리를 더 내리면 경기부양 효과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발언이 많다. 그러나 재계의 설명은 딴판이다. 투자 부진 이유로 △부채비율 2백% 제한 △은행의 엄격한 자산건전성 분류기준(FLC) △출자총액 제한 △증시 침체에 따른 증자 불가 △경제 불확실성 등을 꼽고 있다.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자기 돈으로 사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는데 어떤 기업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투자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따라서 금리 수준은 투자 확대에 전혀 영향을 못미친다. 윤창현 명지대 교수는 "정상적인 경기 순환에서 일시 불황으로 금리가 내려간 게 아니라 밑바닥에 짙게 깔린 경제 불안정이 금리를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금리는 무관한 경제 변수가 됐다"고 지적했다. ◇ 움츠러든 기업들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등 삼성 계열사들은 금리가 연초보다 낮아졌음에도 하반기 투자 계획을 연초보다 30% 이상 줄였다. LG SK 등 다른 대기업들도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라 '마른 수건 쥐어짜기' 식으로 경비 절감과 구조조정에 나섰다. 전경련이 최근 매출액 기준 4백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 하반기 시설투자가 상반기보다 2.8% 줄어든 14조9천6백82억원에 그칠 것으로 집계된 것도 기업들의 투자 마인드가 얼마나 위축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중소기업들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조유현 중소기업중앙회 정책총괄팀장은 "금리는 낮지만 세계적인 경기 위축에다 IT(정보기술) 산업의 침체로 인해 중소 기업들이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정구학.오형규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