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역시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대우 몰락의 긴 이야기를 하면서 김우중 회장과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의 개인적 인연을 말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끝내는 악연(惡緣)으로 정리된 두 사람이었다. 한때는 좋은 인연으로 만났으나 한사람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정처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됐고 다른 한 사람은 금감위원장과 재경부 장관을 거치는 등 당대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년 전인 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룹 총수와 그를 보좌하는 비서실 상무.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1969년 재무부 사무관으로 출발, 10년 만에 부이사관(재정금융심의관)에 오를 만큼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율산사건에 걸려들어 의외의 '낙마'를 당했고 한국개발연구원(KDI) 초청연구원으로 겨우 자리를 걸쳤다. 35세에 이미 풍상을 겪었다 할, 갈곳 없는 이헌재를 거둬준 사람이 바로 김 회장이었다. 82년 11월 이헌재는 대우그룹의 비서실 상무로 첫 출근했다. 김 회장은 행시 수석(6회), 경기고 후배, 재무부의 엘리트 코스인 금융정책과장을 거친 이 위원장을 눈여겨 봤다. 김 회장(52회 졸업)은 이 위원장(58회)의 경기고 6년 선배. 이 위원장은 '모피아'(재무부의 별칭) 출신답게 '윗 사람' 모시는 것은 확실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자주 진언해 총애도 받았다. 그러나 '굴러온 돌'이었던 만큼 미움도 견제도 많이 받았다.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 것은 인간 이헌재의 숙명같은 것이기도 했다. 순발력과 풍부한 아이디어,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쌓은 해박한 지식…. 거기에 앞뒤 가리지 않는 거침없고 직선적인 언행…. '이헌재 상무'는 신규사업 검토, 해외제휴 협상 등을 맡았다. 김 회장의 총애에 걸맞은 비중있는 업무들이었다. 이 위원장은 GM이나 오펠과의 제휴협상을 위해 당시 최명걸 대우차 사장과 미국 독일 등지를 부지런히 출장다니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당시의 제휴문제에 대해 "GM은 이미 거대한 세계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었고 제휴해 봤자 질질 끌려 다닐 것이기 때문에 반대했었다"고 회고했다. 이 위원장은 대우반도체 대표이사(전무)로까지 승진했으나 만 1년을 더 근무한 뒤 2년3개월 만에 대우를 나왔다. 그가 떠난 뒤 GM과의 합작이 성사되고 오펠 모델인 르망이 대우차의 기본모델로 채택됐다. 16년 뒤 두 사람은 전경련 회장과 금감위원장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대그룹의 총수 겸 재계 대표가 됐고 또 한 사람은 그동안 일고여덟개 자리를 잡초처럼 전전한 뒤 정권이 바뀌면서 일약 장관으로 올라선 다음이었다. 한사람은 구조조정을 지휘하는 금감위원장, 또 한사람은 부도위기에 몰려 무너져 내리고 있던 부실기업주였다. 경기고 출신인 한 관료는 "대우에서 일했고 김우중 회장과 경기고 동문이란 인연을 가진 이 위원장은 주위 눈을 의식해 대우처리에 더 독하게 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형규 기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