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이후 개발경제 시대에 대한선주(현 한진해운)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외항선사로 수출물량을 5대주 6대양에 실어날랐던 조양상선이 경영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좌초했다.

지난 61년 박남규 회장이 해운강국의 기치를 내걸고 창립한 조양상선은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탄탄한 내실경영과 진취적인 항로 개척으로 세계 해운업계에서 주목받는 선사로 성장을 거듭했다.

79년 우리나라 선사로서는 처음으로 극동~유럽간 정기항로를 처음 개설하는가 하면 같은해 호주항로까지 개척해 독점 운항에 들어가는 등 위세를 떨쳤다.

81년에는 지중해 항로까지 개척,세계 주요 지역을 모두 운항하는 유수의 선사로 발돋움했다.

이같은 성장세에 힘입어 81년 제5회 해운의 날에는 외항해운 운임수입 1억달러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조양상선은 그러나 세계적인 대형 선사들이 선대재편 작업에 들어간 90년대 초부터 경쟁에서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국내의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물론 미국 APL,덴마크 머스크 등 세계적인 선사들이 컨테이너선의 대형화 및 스피드화를 추진하는 선대재편 과정에서 조양상선은 투자 여력이 딸려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양상선은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 물동량 유치 경쟁에서 처지지 시작했다.

조양상선은 경쟁력 저하를 만회하기 위해 독일의 세타토 등이 결성한 세계일주항로(RTW)서비스 동맹에 참여했지만 결국 이 결정이 조양상선의 몰락을 가져온 단초가 됐다.

약 3천억원을 투자한 세계일주항로 서비스는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경영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외환위기로 더욱 자금사정이 악화된 조양상선은 99년 7월 건실한 기업으로 평가받던 제일생명을 알리안츠에 매각,4천3백70억원의 매각대금을 모두 부채상환에 사용하는 등 회생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양상선은 97년 이후 금융권 부채 6천7백억원과 이자 3천억원을 상환했지만 서울은행 등 채권단은 부채 전액상환을 요구해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바다의 날(31일)을 앞두고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김상철?김용준 기자 cheol@hankyung.com